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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름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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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Aug 13. 2020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슬픔을 바라보는 슬픔

 창을 열어도 비가 들이치지 않았다. 방바닥이 말라있었다. 이제는 여름을 걸어도 되겠다 싶어 걸었다. 마른땅을 골라 밟으려고 했는데 사방이 젖어있었다. 돌아갈까 하다가 그러기엔 비그친 하늘이 아까워 그냥 걸었다. 젖은 땅은 어느 곳을 밟아도 상관없겠지 싶어 아래를 내려보지 않고 크게 팔을 흔들며 성큼성큼 걸었다.

 걸을 때마다 다가오는 눈앞의 여름은 시원한 바람과 눈부신 해를 내어주었다. 길을 가로막던 비바람은 더 이상 퍼붓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고 속삭였다. 그토록 상냥한 말투는 오랜만이라 기대를 품었다. 언젠가 옥상에 널어둔 걸 잊고 며칠 동안 젖었다 말랐다 반복했던 청바지처럼 꾸덕꾸덕해진 마음이 부드러워질 준비를 했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크게 웃을 준비도 되어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크게 더 크게. 그때 웅덩이를 밟았다. 퍽 깊어 종아리까지 빠졌다. 가벼웠는데,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돌아보니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했던 여름의 속삭임은 사라졌다. 곁에 있는데도 입을 다물고 없는 척하는 것 같았다. 물웅덩이를 밟으며 걸었다. 퍽 깊어 허리까지 빠졌다. 물웅덩이를 밟으며 걸었다. 퍽 깊어 이마까지 빠졌다.

 물속을 눈을 뜨고 걸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물속의 누군가가 웃었다. 그럴 것 같았다는 듯 물 밖의 누군가가 들여다보았다. 불씨가 꺼진 여름의 눈동자였다. 그것을 향해 나는 손을 내밀었다. 아직 따뜻했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의 표지에 마음을 빼앗겼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초록 언덕에 오른 산뜻한 마음을 미리 엿본 것 같아 망설임 없이 시집을 펼쳤다. 습기가 없는 가벼운 하늘과 언덕을 오르며 만나는 꽃과 나무와 작은 새들을 만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 편의 시를 읽고서 알았다. 이 시집에 그런 언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돌아보니 사방이 웅덩이였다"는 앞선 문장은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 나온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를 따라 적은 것이다. 안희연의 시는 슬픔으로 가득 차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슬픔뿐이다. 너무 많은 슬픔이 겹겹이 쌓여있어서 시간이 멈춘 물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빨리 걸으려 해도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는 물속의 걸음, 꿈속까지 이어지는 슬픔이다. "하늘의 절반은 이미 바다가 되어" (<가끔의 정원>)있는 끝을 알 수 없는 슬픔이자 "나답게 우는 법을 몰라서/앵무의 울음을 따라"(<앵무는 앵무의 말을 하고>)하는 언어의 정체성조차 잊어버린 슬픔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오늘을 살아" (<스페어>)갈 수밖에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이상하게도 슬픔의 시를 읽는데 더 이상 슬퍼지지 않았다. 끝까지 가라앉았는데 무겁지 않았다. 시인이 오래도록 곁을 지킨 슬픔은 어깨를 누르며 일어서지 못하게 누르는 슬픔이 아니었다. 한자리에서 영원을 지켰다가 떠난 슬픔의 흔적을 살피는 또 다른 슬픔이었다.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테니 힘내라는 응원이나 슬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당위가 슬픔에 도움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시인이 부르는 노래를 낮은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상처 입은 피부에 진물이 나고 딱지가 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딱지가 떨어지고 흉터가 남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비슷한 음조를 지니고 있었다. 통증 없이 흉터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안희연은 슬픔을 보고 또 보고 되돌아가서 다시 본다. 오래전 흘러간 슬픔을 굽어보고 밑바닥에 흩어진 슬픔의 찌꺼기에 달라붙은 슬픔을 벗어난 감정들을 응시한다. 슬픔으로 깨진 마음의 조각들을 억지로 꿰어 맞춰 다 지나갔다고 말하는 것으로 슬픔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맨발로 깨진 조각을 밟아도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될 때까지 재생 버튼을 누르고 되감기를 반복한다.(카세트테이프를 보기 힘든 요즘이지만 비유할 만한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반복하는 사이 삶은 흔들리기도 하고 젖은 채 얼어붙기도 하고 바닥까지 떨어지기도 하지만 슬픔에 대해 담담한 마음을 획득한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여름언덕에서 배운 것>)라고 하며 울상을 짓다가고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여름언덕에서 배운 것>)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결국 여름이라는 혹독한 계절을 거친 슬픔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의 첫 번째 시 <불이 있었다>에서 피워 올린 불 앞으로.


오늘은 불을 피워야지 / 그는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피웠다 /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을 꿈꾸었다/ 삼키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태우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이런 곳에도 집이 있었군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호주머니 속 언 손을 꺼내면/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불이 있었다>)


 그곳에서 불을 쬐고 온기를 얻고 다시 길을 가다가, "꿈은 사납고/ 신발은 헐거워지고/톱밥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을 때가 찾아오면"(톱) 걸음을 멈추는 일도 있겠지만, 혹독한 여름을 지내고 비로소 그 여름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걸을 것이다. 그러다 시집의 마지막 시처럼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열과>) 말하며 이어질 여름으로 나아갈 것이다.

 휘청거리는 밤과 비명 지르는 낮에도 슬픔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여름 언덕을 오르게 될 것이다. 슬픔을 담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생을 담담히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며.




   겨울이 되기 전 습기가 바짝 말라버린 계절에 아마도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소동> <업힌> <내가 달의 아이 었을 때> <마중> <알라메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호두> <열과>가 특히 좋았다.


 기억의 동물은 입구가 낮았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고개를 조금 숙여야 했는데 마치 어떤 시간을 향한 인사 같았다 동굴은 기억의 조도를 조절하듯 서서히 어두워졌고 서서히 밝아졌다 가장 깊은 어둠에 다다랐을 땐 낯선 기억 하나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곰곰 생각해봐도 직접 겪었던 일은 아니었다


 그건 누구의 기억이었을까 골똘히 동굴을 빠져나오자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가 서 있었다 지도상으로는 여기가 분명했지만 호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노란 나비 한 마리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비가 내려앉은 곳에 손바닥만 한 호수가 있었다

    -안희연, <알라메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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