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추억의 힘과 여름의 힘이 겹치면서 탄생한 작가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생각보다 즐거웠기 때문이다. 누구나 여름을 지나왔으며 여름의 순간에 대한 추억을 품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에피소드에 대한 공감되는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 같은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의 솔직함과 경쾌함이 좋았다. 책 속의 여름은 나의 일기장처럼 꾸밈이 없다. (특정시기에는 일기를 꾸며서 쓰기도 했지만...) 은유도 없고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름이라는 계절에 풍덩 빠져들었던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와 빛나던 내가 있을 뿐이다.
조카가 '기쿠지로의 여름'을 칠 줄 아냐고 묻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는 여름이 커다란 나뭇잎을 드 뒤에 꽂고 시골길을 걷는 기쿠지로와 마사오를 떠올리며 피아노를 친다. '따라라라 라라라' 로 시작하는 내게도 너무나 익숙한 멜로디의 히아이시 조의 'summer'. 이 곡을 치면 햇빛이 내려앉아 반짝거리는 강물과 다디단 냄새를 뿜어내며 익어가는 복숭아, 커다란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그림자와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떠오른다. 모두 여름의 풍경이다.
나는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주변 풍경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밋밋한 하얀 벽지를 두른 단조로운 방안은 피아노 건반을 흐르는 'summer'의 선율 하나로 순식간에 여름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책을 읽으면서 히사이지 조의 'summer'을 반복해서 들었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여름의 순간마다 나의 여름도 함께 했다.
누구에게나 기억되는 여름의 순간들이 있다. 작가는 체육수업이 끝난 운동장 세면대에서 쏟아지던 물의 감촉을, 친구랑 헤어지기 아쉬워 버스정류장에서 수다에 몰두하던 오후를, 한강에서 뛰다가 숨을 고를 때 불어오던 산들바람을, 하드 하나를 입에 물고 맥주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걷고 퇴근길을 이야기한다.
여름이 되면 알 수 없는 '기대'를 하고 가슴이 뛰는 증상은 이제 없지만 지나온 여름을 다시 돌아보면 잊고 있던 풍경들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반가웠다. 그리고 그리웠다. 여름 속에는 상처도 아픔도 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는 즐거운 기억만 떠올리게 됐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쉬움을 책을 통해 과거를 소환하는 것으로 달래는 시간이 되었다.
여름을 둘러싼 기억을 불러 모으고, 추억을 곱씹고, 글로 꺼내놓는 동안 여름이 얼마나 힘센 계절인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여름을 향한 애정도 다시금 샘솟았다. 여름은 늘 그런 식이다. 부푼 가슴으로 기다리면서도 정작 다가오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맛만 다시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예상보다 많은 추억이 쌓여 있다.
- '여름은 힘이 세다' 중
특히 '수입 맥주 만 원에 네 캔'이라는 글에 몹시 공감해서 초집중을 하면서 읽었다. 내가 편의점에서 캔맥주 고르는 방식에 대해서 새삼 깊은 고찰을 하게 되었다. 작가는 수입맥주 고르는 구성안까지 짜놓았는데,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1. 첫 캔은 언제 어디서 마셔도 무난한 유럽산 라거 또는 필스너를 고른다. ex)칼스버그나 1664 하늘색 말고 파란색. 하이네켄 중 하나.
2. 두 번째 캔은 가볍고 청량한 미국 라거 중에 하나를 고른다. ex)버드와이저나 밀러 중 하나.
3. 세 번째는 진한 풍미를 가진 맥주로 골라본다. ex)바이젠이나 에일 종류 중에서 하나. 사실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음.
4. 마지막 캔은 갑자기 도전 정신을 발휘해야겠다는 생각에, 이제껏 안 마셔봤지만 왠지 모를 카리스마가 느껴지거나 패키지가 신기하거나 낯선 나라에서 만든 맥주 중에 고른다. 다음에 같은 걸 또 고르는 일은 없음.(만나서 별로였고 다신 보지 말자.)
-수입맥주네캔에만원_구성안_최종 doc-
내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라거, 필스너를 주로 고르고 향이 진한 맥주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 내가 주로 사는 네 캔에 만원하는 편의점 맥주를 분석해보니, 나라와 관계없이 거의 초록색 캔이었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캔맥주에 색에 대한 내 취향을 반영할리 없건만 내가 고르는 맥주의 절반 이상은 초록색이다. 여름이 되면서 편의점 캔맥주를 다른 계절보다 더 자주 마시는데, 최근에 구입한 캔맥주를 보니 역시 초록이 많다. 칭따오, 그롤쉬, 하이네켄, 벡스 등. 편의점 냉장고에 그롤쉬나 벡스는 자주 비어있어서 자주 못 산다. 대신 칭따오, 하이네켄은 반드시 장바구니에 넣는 편이다. 그 외에는 버드와이저, 크롬베커, 스텔라도 고른다. 클라우드를 선택하는 빈도도 비슷하다. 풍미가 강한 호가든은 아무리 노력해도 친해지지 않는 맛이다.
여행에 관한 글들- 발리와 괌, 호캉스 여행에 대해서는 나의 추억이 자리잡지 못했지만 우당탕탕하는 듯한 에피소드가 재미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식물'편은 캔맥주편과 비슷하게 진지하게 읽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마이너스의 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집에 크고 작은 화분을 들여놓을 때마다 결국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비극적 결말을 이끌어냈다. 꽃집 주인에게 들은대로 햇빛이 드는 곳에 물을 자주 주는 식물일 때도, 반그늘에서 물을 거의 주지 않아야 하는 식물일 때도 그랬다. 세상 키우기 쉽다는 아이비나 트리안도 소용없었다. 그 아이들은 모두 잎이 시들어갔다. 물을 너무 주지 않았나 싶어 물을 주었는데, 마지막에 이르기 전에 흙에서 껴내봤을 때는 뿌리에 엉겨 붙은 흙이 뭉친 채로 젖어있었다. 내가 식물을 키운 습관을 돌이켜보니, 물을 주는 날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생각나면 주고 잎이 마르면 주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식물을 돌보면서 내 손끝에 식물의 생이 결정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나마 여름이 되기 직전에 데려왔던 이름 모를 다육이 셋과 허브 둘은 잘 키워내고 있다. 물 주는 시기를 기억하고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두며 식물들의 잎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내고 초록이 내뿜는 빛을 들여다본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것처럼, 우리 집 식물들도 여름을 좋아하는 것 같다. 더운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 바람이 부는 날 모두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계절이니까. 여름날 한껏 에너지를 충전한 식물들은 추운 겨울이 되어도 실내에서 잘 버틴다. 날씨가 좋은 날은 유리창 안쪽에서 간접 햇살을 맞으면서,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는 듯 꾸준히 자란다.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 식물' 중-
이번 여름은 여름답지 않게 비 오면서 바람이 부는 날이 너무 많았지만 그럼에도 여름은 여름이니까. 남은 햇빛이 있다면 여름이 사라지기 전까지 한껏 받아들여야겠다. 창가에 놓인 식물도, 집콕에 맛을 들인 나도.
작가가 써 내려간 여름의 순간에는 어린시절보다는 어른이 된 이후에 맞이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래서 여행과 작업실, 무엇보다 술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편의점 맥주에 이어 레몬소주, 한낮의 생맥주에 대한 추억이 나올 때면 그시절 비슷한 장소에서 내가 마셨던 술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풉 웃어버렸다.
손잡이가 달린 500 시시 맥주잔은 한참 전부터 냉장고에 들어가 있었는지 얼음처럼 차가웠고, 살포시 서리가 낀 잔에 가득 담긴 맥주는 투명한 노란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잔 위쪽에 5센티미터 정도로 두텁게 올라가 있는 크림 거품은 영원히 그렇게 있을 것처럼 굳건했다. 처음 들 때는 묵직한 이 잔이 가벼워지는 데는 2분도 걸리지 않았다. 자고로 그 날은 첫 생맥주는 기도가 허락하는 한, 원샷으로 마실수록 좋으니까.
-'최고의 생맥, 낮술' 중-
술 이야기에 왠지 모르게 신이 난 것 같지만 사실 책을 읽으면서 여름날의 추억에 잠시 잠길 수 있어서 신이 났을 뿐이다. 술은 부록일 뿐 진짜는 여름에 있다는 것. 그러니 방점은 술이 아닌 여름에, 여름의 순간에 찍어야 한다는 것. 음 어쩐지 편의점 캔맥주를 마시면서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이기는 하지만.
여름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시절들이 있었다. 어린시절 여름은 우리집 마당에 심은 포도나무에 초록색 작은 열매가 맺히는 걸로 시작되었다. 작은 잎사귀와 가느다란 덩굴 아래에는 작은 수돗가가 있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처럼 몇몇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작가의 말처럼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여름날의 추억'으로 늦은 오후 이 책을 읽었다. 방안에서는 'summer'가 흐르고 책 옆에는 (직접 만든) 차가운 레몬에이드가 놓여있었다. 책을 덮었을 때 지나간 여름의 한 조각이 심장에 콕 박혔다. 눈물 대신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따뜻한 조각인 것 같다. 어떤 의미로든 여름은 힘이 세다. '언제든 꺼낼 볼 수 있는 여름날의 추억'이 있는 한 더욱 그럴 것 같다.
내게도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여름날의 추억이 있다. 여름이 그 추억만큼 나를 키운 것이다. 여름은 담대하고, 뜨겁고, 즉흥적이고, 빠르고, 그러면서도 느긋하고 너그럽게 나를 지켜봐준다. 그래서 좋다. 마냥 아이같다가도 결국은 어른스러운 계절. 내가 되고 싶은 사람도 여름 같은 사람이다.
-'이야기의 시작, 여름은 힘이 세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