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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Sep 02. 2020

여름의 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사랑은 너무 조용해서 아무도 눈치챌 수 없다. 여름에 찾아온 사랑이 모두 여름을 닮지는 않는다. 밤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여름 끝자락에 만난 <여름의 끝>에 나오는 엘리는 생에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혼자 한 조용한 사랑. 잔잔한 호수처럼 보이는 엘리의 얼굴과 달리 심장 밑바닥에서는 생을 흔들어놓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 솟아났다.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라스모이. 그곳은 움푹 꺼진 지대에 자리한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고인 물처럼 어제와 오늘의 차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단조로운 곳. 마을에서 변화라는 단어는 오래전에 멈추었고 앞으로도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현재와 비슷하게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한 곳에서는 마을사람들의 일상도 예측에서 크게 벗어날 일이 없다.


 농부들은 매달 첫째 월요일에 가축을 들여오고 농부의 아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늘 사던 매장에서 식료품을 사고 포목점에서 옷이나 커튼 재료를 산다. 한때 번창했던 제분소가 문을 닫자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유제품 공장과 건축자재 야적장, 생수공장으로 옮겨갔다. 교회 두 곳과 수녀원, 기독교형제회 부속학교, 실업학교가 있는 있는 이 작은 마을의 중심에는 은행과 치과와 법원이 있다. 그리고 그 거리의 끝에는 버려진 기차역이 있다. 더 이상 기차가 오지 않는 마을. 이별은 기차역이 아닌 곳에서 이루어진다. 마을을 떠나는 이들은 주로 젊은이들이었지만 그들 대다수는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한때 도시에서 살다가 돌아왔지만 그들은 마을에 어떤 변화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차가 오가고 제분공장이 바쁘게 돌아가던 시절을 지난 시골마을은 조용하다. 라스모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새로운 일이나 특별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시골마을에서 여름 동안, 조용한 사랑이 있었다.

  

 조용한 사랑의 주인공 엘리는 코널티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플로리언을 만나게 된다. 나이는 어리지만 엘리는 결혼한 몸이었다. 아기 때 버려져서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던 엘리는 지금은 남편이 된 댈러핸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오게 된다. 자신의 실수로 아내와 아기를 한꺼번에 잃은 댈러핸의 집안살림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누이들의 판단 때문이었다. 수녀원에서만 자란 엘리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판단에 따라 수녀원에서 댈러핸의 집 가정부로, 몇 년이 지난 뒤에는 댈러핸의 판단에 따라 댈러핸의 아내가 된다.

 엘리는 살면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세상과 단절된 채 또래의 고아소녀들과 수녀원에서 자라난 다음에는 댈러핸의 가정부로 아내로. 선택하지 못한 삶을 살았기에 바라는 것도 없었다. 엘리에게는 날마다 반복되는 집안일과 간단한 농장일이 전부였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댈러핸와 부부가 되었지만 결혼생활은 가정부로 생활할 때와 차이가 없었다. 침대를 함께 쓴다는 점만 빼면.

 

 소설에서 엘리가 등장할 때마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의 세세한 부분 - 이를테면, 아침이면 부엌에서 고기기름을 프라이팬에 올려 녹이고 식탁에 나이프와 포크를 놓고 식사를 마치면 그릇을 개수대로 가져가 뜨거운 물을 틀어 불려두고 의자를 식탁 밖으로 꺼내 비질을 하고 청소를 마치면 계단 아래 벽장에 쓰레받기를 걸고 빗자루를 그옆에 걸고 환기를 시키는. 창틀에 놓인 흰 물병에 시든 꽃을 싱싱한 꽃으로 바꾸고 암탉에게 모이를 주고 달걀을 주워 모으고 자전거 뒷바퀴에 공기를 주입하고 라스모이까지 7킬로미터 자전거 달걀 배달을 하는. 텃밭에서 잡초를 뽑고 당근을 솎아내고 콩을 수확하는 등등-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묘사된다.

 소설 초반에서는 라스모이 마을의 풍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는데 엘리가 나오는 장면에서도 비슷하게 묘사가 펼쳐져서 다소 지루해지려고 했다.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나자 지루할 정도로 길었던 묘사가 소설의 분위기와 어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의 단조로운 일상에 대한 묘사는 나중에 그녀가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통해 빛을 발한다. 자신의 삶에서 한 번도 선택을 해본 적이 없는 엘리는 플로리언에게 사랑을 느낀 다음 순간부터 '선택'의 단추를 누르게 된다. 단조로운 일상에 비밀이 생기면서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랑은 오직 엘리에게만 찾아온 감정이었다. 상대방인 플로리언이 엘리에게 느끼는 감정은 따뜻함이나 친근함, 그리고 자신이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에 새겨둘 추억의 대상 정도였다.


 혼자만의 사랑에 빠진 엘리는 처음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하려고 한다. 여행가방을 몰래 사 와서 플로리언을 따라가려고 한다. 상대가 반응하지 않은 엘리의 사랑에 동조할 수 없었지만  행동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플로리언에게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시종일관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플로리언은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는 나약한 인간이다. 재능 있는 화가였던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어떤 일에도 의욕이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집은 처분하고 떠나기로 한다. 플로리언은 엘리가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하면 몰래 도망갔을 것 같지만 만약 함께 떠났다고 해도 두 사람은, 아니 엘리는 불행했을 것이다.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플로리언의 머릿속에 엘리의 자리는 없었으니까.


 <여름의 끝>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특별히 나쁜 사람은 없다. 그저 비슷한 아픔을 겪었을 뿐이다. 등장인물들 대부분은 과거의 아픈 기억에 붙잡혀있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민박집을 운영하는 코널티 양은 실패한 사랑 때문에 겪었던 아픔에 사로잡혔다. 마을을 떠도는 오펀 렌 노인은 과거 자신이 섬겼던 가문만을 기억하며 날마다 버려진 기차역에서 사라진 가문의 누군가를 기다리고, 엘리의 남편 댈러핸은 7년 전 자신의 실수로 아내와 아기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해마다 6월이 되면 괴로워한다. 플로리언은 어린시절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집이 초라하게 망가져가는 과정을 망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함에 지쳐있다. 그의 손에 들린 책,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도 플로리언의 마음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소설의 끝부분에 작은 시골마을은 다시 조용해진다. 엘리의 사랑은 코널티 양을 빼고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선택 버튼을 누르려던 엘리의 손은 다시 일상의 단조로움을 누른다. 여름에 갑자기 찾아온 사랑보다는 남편 댈러핸의 아픔을 감싸안으며 일상을 이어가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는 떠날 것이고,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가 떠났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지금 아침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가 있다는 사실인 것처럼. 눈을 뜨면 분홍색으로 칠한 벽과 빈 벽난로 위의 성화, 그리고 창가에 놓아둔 자신의 옷이 지금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사라질 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여름의 끝> 중-


 침묵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막혀버린 듯했던 대화는 정원을 산책하는 동안 조금씩 되살아났다. 수염가래꽃, 부들레야, 안개나무에 아직 남은 뭉글뭉글한 여름 꽃, 매자나무, 층층나무, 뿔남천. 엘리는 그 식물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몰랐던 이름들이었다. 이어 두 사람은 여름의 그 새가 왔는지 보려고 호수로 갔지만 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다음 자두나무 너머로 전에 라즈베리가 있던 곳에서 그들은 스칸디나비아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름의 끝> 중-

 

 책 표지가 사뭇 강렬하다. 칼로 풋사과를 벗기는 투박한 손이 보인다. 나무에서 갓 따낸 듯 잎사귀가 달려있는 사과의 껍질을 벗기고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손의 주인이 엘리임을 짐작하게 된다. 수녀원에서 살 때 엘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목을 맨 수녀의 이미지였다. 금기시된 사랑에 대한 결말이었다. 그런 엘리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지만 거절당한다. 사과의 초록 껍질은 엘리가 그동안 벗어내지 못한 미성숙한 자아라면 사과 껍질을 벗기면서 엘리의 삶에는 말할 수 없는 비밀과 아픔이 자리잡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친 엘리는 더 이상 주눅 든 모습으로 살아가던 고아소녀가 아닌 엘리라는 한 사람의 몫으로 당당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부디 바란다. 모든 선택지에 답을 적을 수 없었던 삶에 작별을 고하고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를.


 조용한 밤이다. 자정 전에 소방차 여러 대가 지나간 뒤로 늘 들리는 도로에서의 소리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잠을 못 자고 있지만 며칠 동안 같은 페이지로 접어두었던 소설을 마저 읽었으니 괜찮다. 내일 몸이 힘들겠지만 특별히 힘들 것도 없다. 지금은 소설 읽는 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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