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우유에는 딸기가 들어있지 않다. 딸기 농축과즙 1%가 들어있는 것을 제외하고 우리가 느끼는 딸기의 맛과 향은 모두 딸기향이 나는 합성착향료의 영향이고 예쁜 딸기색은 코치닐 색소로 만들어졌다. 우유도 원유 100%가 아닌 저지방 우유, 탈지분유, 전지분유를 섞어 만들었다. 딸기우유는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다. 진짜이고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인위적인 성분들의 조합일 뿐이다. 그럼에도 하양에 가까운 분홍 액체를 마시다가 봄날의 딸기가 들어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었다.
최은영의 <그 여름> 속 이야기는 열여덟의 여름에서 시작되어 서른넷의 여름에 마무리된다. 끝의 의미는 아니고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처음의 장면을 환기시키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임을 재확인해주는 방식이다.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끌어갔으며 닫는 사람은 이경과 수이.
그들은 열여덟 여름에 처음 만났다. 토요일 오후, 수이가 찬 공에 이경이 얼굴을 맞아 안경테가 부러지고 코피가 나는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고친 안경을 쓰고 수이를 본 이경은 안경을 처음 맞춘 날처럼 어지러움을 느꼈다.
둘은 읍내를 걷다 다리 난간에 서있다가 강 위를 위태롭게 날고 있는 날갯죽지가 긴 새 한 마리를 봤다. 이경이 새의 이름을 묻자 수이는 왜가리라고 했다. 다리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경은 수이의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 뒤 일주일 동안 수이는 이경의 교실에 딸기우유를 들고 찾아왔다.
다음날 수이는 이경의 교실 앞으로 찾아왔다. 손에는 이백 밀리리터짜리 딸기우유가 들려 있었다. 우유를 내밀면서 수이는 쑥스럽게 웃었다.
"몸은 좀 괜찮아?"
"응. 괜찮아."
이런 식의 짧은 대화를 나누고 수이는 운동장으로 갔다.
그 주 내내 수이는 딸기우유를 들고 왔다.
"몸은 좀 괜찮아?"
"응. 정말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이경의 얼굴에도 결국 웃음이 돌았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면 이경은 오늘도 수이가 찾아올 것인지 기대했고, 수이가 오지 않더라도 상심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달래기도 했다.
-<그 여름> 중
딸기우유를 들고 찾아오던 수이는 예체능반으로 축구부였고 이경은 문과반이었다. 축구공 사건이 없었다면 만날 기회도 없었을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하지만 축구공과 딸기우유로 시작된 여름 동안 둘은 늘 함께였다. 딸기가 들어있지 않은 딸기우유가 달콤하듯 수이와 이경은 상대를 향한 감정에 숨겨진 단단한 알맹이를 모른 채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여름의 더운 열기와 함께 사랑의 밀도는 높아져갔다.
동성애를 다루고 있지만 사랑의 속성만을 놓고 봤을 때, 특별히 동성애가 아닌 일반적인 사랑의 시작과 끝으로 이어지는 과정처럼 보인다. 여름은 뜨거운 열기로 품으며 시작된다. 처음에는 생명력 넘치듯 올라오는 여름은 시간이 흐르면서 상한 과일냄새 같은 것을 풍기며 시들어간다. 여름의 끝은 대체로 그렇게 사라졌다.
이경과 수이가 느낀 열여덟의 여름이 '강을 따라 돌고 돌아가던 길에서 나던 물 냄새와 풀냄새, 오래된 스쿠터의 엔진 소리와 자신의 허리를 감싸안던 따뜻한 팔의 감촉'으로 새겨져있다면, 스물한 살의 여름은 '쓰레기봉투에서 흘러나온 오렌지빛 액체를 바라보는' 참담함이었다.
그 즈음 이경은 수이 대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겨 수이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러면서 수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기로 한다. 그때는 그런 걸 배려라고 생각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경은 자신이 '단지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이고 위선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수이의 집에 자신의 물건을 챙기러 갔을 때, 이경은 수이의 상처 입은 얼굴과 마주한다. 수이는 이경과 처음 만났던 열여덟의 여름과 그 시간들을 채우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이제 네가 날 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없겠지."
수이는 그 말을 하고 오랫동안 울었고 이경은 그대로 있었다. 다음날 수이가 출근한 다음에야 이경은 눈물을 흘린다.
수이가 방을 나서고서야 이경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잘 자', 그렇게 말하면서 불을 끄던 수이, 그것이 이경이 마지막으로 본 수이의 모습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언제 사다 놓았는지 모를 딸기우유 팩들이 나란히 줄 서 있었다.
-<그 여름> 중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난 줄도 모르고 수이는 열여덟부터 주기 시작했던 딸기우유를 계속 준비해두고 있었다. 세상은 고등학생이었던 수이가 내려보았던 강물보다도 넓은데 수이는 이경과의 관계 속에서만 머물고 싶어 했다. 더 나아가려 해도 나아갈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십삼 년이 흘러 서른넷이 된 이경은 여름에 잠시 고향집에 들렀다. 엄마의 스쿠터를 타고 동네를 몇 바퀴 돌던 이경은 열여덟의 여름에 수이와 함께 갔던 안경점도 분식집도 수이의 집도 모두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경은 언젠가 수이와 함께 섰던 다리 난간에 기대 강물을 바라보며 수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예전에는 유속이 빠른 강이었는데, 이제 그 강은 천천히 흘러갔다. 수이가 이름을 알려주었던 날갯죽지가 길쭉한 회색 새 한 마리가 '강물에 바짝 붙어' 날아가고 있었다.
더 이상 딸기우유를 마시지 않듯 이경은 수이를 잊어갔고, 수이를 추억할 수 있는 장소들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이경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수이의 이름이 깊이 남아있었다. 수이가 알려주었던 회색 새의 이름도 남아있듯이.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이 바뀌어도 끝내 가슴 밑바닥에 남는 것들이 있다.
딸기우유에 딸기가 들어있지 않았어도 한때 봄날의 딸기를 믿었던 마음처럼 간직되는 마음들이 있다.
이경에게는 자신에게 딸기우유를 가져오던 수이의 순간들이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