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파리는 청량한 빛을 뿜어냈다. 어느 곳을 가도 그림에 나올법한 풍경이 펼쳐졌다. 새파란 하늘과 짙은 초록이 어우러진 공원,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 독특하고 세련된 감각이 응축된 패션거리와 알록달록한 테이블보가 깔린 비스트로와 에스프레소 향을 풍기는 카페테라스, 하얀 셔츠에 청바지만 입어도 모델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환한 미소까지도. 벽에 걸어두고 오래도록 보고 싶은 아름다움에 나는 푹 빠져버렸다. 그래서 파리에 도착한 처음 사흘 동안은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개선문, 샹젤리제,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에펠탑, 오페라 하우스, 노트르담 성당, 몽마르트 언덕부터 마레지구, 외곽의 베르사유까지. 긴 거리는 지하철을 탔지만 대부분은 걸었다. 성실한 초보 여행자답게 수첩에 적힌 대로 빼곡하게 하루치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발이 부어올랐다. 숙소는 아침마다 맛있는 바게트를 굽는 빵집이 있는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해있었다. 파리사람들은 예의가 발랐다. 영화에나 나올법한 낡은 승강기를 탈 때면 눈을 맞춰 인사했으며 뒤에 서있으면 문을 잡아주었다. 아침 일찍 바게트를 사서 품에 안고 걸을 때면 다소 들뜨고 낭만적인 마음이 스며들었다. 주택가 골목에서 죽은 까마귀를 발견할 때의 섬뜩함을 빼고는 모든 것이 다 좋았다.
관광코스를 모두 갔기 때문에 나흘째부터는 여유를 가지고 다시 둘러보기로 했다.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에서 각각 하루를 보낸 다음날 나는 노트르담으로 향했다. 높이 솟은 첨탑 앞에서 사진을 찍고 화려한 모자이크를 구경하고 황금빛 주화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리 건너편에 있는 고서점으로 갔다. 제임스 조이스나 헤밍웨이를 비롯해 여러 작가들이 사랑했던 그곳에서 나는 명확히 해석되지 않는 오래된 책을 들여다보다가 벨벳 의자에 엎드린 고양이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나왔다. 그런 다음 길고 딱딱한 바게트 샌드위치와 콜라를 사서 노트르담 성당이 보이는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딱딱해서 잘 씹히지 않았고 바게트 속을 채운 차가운 계란은 자꾸 흘러내렸다. 겨우 삼키고 다시 한입을 베어 무는데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경찰 세 명이 한 남자를 붙잡아서 끌고 온 것이다. 남자는 울먹였고 경찰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었다. 낡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이 옆에서 울부짖자 경찰들은 고함을 질렀다. 여자들의 손에서 공책이 떨어졌다. 여자들은 관광객들을 속여 기부 명목으로 사인을 받아 돈을 출금하는 수법으로 사기를 친 것 같았다. 수갑이 채워진 남자는 어쩌면 관광객들의 가방을 노린 소매치기로 붙잡혀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들이 모두 집시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상황이 종료되자 공원은 다시 고요해졌고, 돌처럼 딱딱한 샌드위치에서는 쓴 맛이 났고 김빠진 콜라는 미지근했다. 나는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몽마르트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어느 도시를 가든 그곳에서만 나는 독특한 냄새가 있다. 파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숙소에서는 큼큼한 양탄자 냄새와 마른 꽃냄새가, 거리에서는 포근한 빵 냄새와 진한 커피향이, 뒷골목에서는 시들어가는 양배추 냄새가 났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냄새는 지하철에서 나는 지린내였다. 특히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러 갈 때면 그 정도가 심각했다. 파리에서는 밤새 거리에 밴 오줌 냄새를 씻어내기 위해 아침마다 물청소를 할 정도다.
몽마르트로 가는 지하철 환승 통로에서 오줌 누는 사내를 보았다. 그의 옆에는 동전 몇 개가 놓인 기타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였다. 머리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무심히 지나쳐갔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아무도 없었다는 듯. 지하철을 갈아타고 개찰구를 나와 걸으면서 구걸하는 사람들과 몇 차례 더 마주쳤다. 구걸의 방식은 다양했다.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 노래를 하며 소리치는 청년, 담담히 사정을 이야기하는 중년 남성. 그들은 사과 한 알이라도 좋으니 아무거나 달라고 했다. 가장 눈길이 갔던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을 두른 아랍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이마를 땅바닥에 대고 있었다.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치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엎드린 몸 위로 하얀 손바닥만 보였다.
몽마르트 언덕에 올랐다. 순백의 샤크레쾨르 성당 앞에서 파리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집시들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들에게서 단호하게 고개를 돌리고 테르트르 광장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한국말로 호객행위를 하는 무명화가들의 외침을 지나쳐 언덕을 내려오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조형물 앞에 앉았다. 동명의 소설에서 벽을 자유롭게 드나들던 남자는 예기치 못하게 벽에 갇힌다. 그는 제발 자신을 꺼내달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아무도 벽 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남자는 영원히 벽에서 나오지 못한 채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는. 파리의 찬란한 아름다움 이면에는 슬픈 이야기들이 많이 숨어있다.
파리에 사는 이방인들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나쳐간다. 파리든 서울이든 어느 곳에라도 이방인은 존재한다. 누군가를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타인의 고통은 그저 타인의 것일 뿐이라고 여긴다면 이방인은 영원히 길 위를 떠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벽에 갇힌 남자의 조형물을 떠나기 위해 일어서는데 주머니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샀던 황금빛 주화였다. 나는 그것을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두 손을 얼굴처럼 내밀고 이마를 바닥에 댄 이들의 눈에 비쳤을 세상이 보였다. 흙과 먼지와 뱉은 껌으로 얼룩진 잿빛 땅이었다. 그곳에는 햇빛 한 조각 머물 공간조차 없었다.
*<에세이문학>2019년 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 요즘 비슷한 생각들이 떠올라 꺼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