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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Sep 06. 2020

택배 왔어요.

일요일 저녁, 누구였을까?

 몇 달 전, 봄기운이 아롱거리면서 피어나 창문을 열어두어도 춥지 않았던 일요일 저녁.

일찍 저녁을 먹고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몇 시간 지나면 기억나지 않을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 화면은 까만 헬멧과 고글을 쓴 사람의 얼굴로 가득 차있었다.

누구지, 이 시간에.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인터폰을 들어 물었다. "누구세요?"

헬맷과 고글로 얼굴을 가린 사람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택배 왔어요."


아, 택배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나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곧바로 문열림 단추를 눌렀다. 기대하지 않았던 '택배'라는 말에 반가움마저 일었다. 나는 웃으면서 가족들에게 물었다. 누구 택배 시킨 사람 있냐고.

없는데x3. 모두 없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우리집 택배 주문의 95%는 내가 한다. 혹시 내가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던 것들을 주문해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 주에는 아무런 결제내역이 남아있지 않았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머릿속으로 헬맷과 고글을 쓴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가 멋대로 펼쳐졌다. 영화 '숨바꼭질'은 왜 떠오르는 건지. 택배라는 말에 문을 열면 헬맷 쓴 사람이 나를 밀치고 들어오고,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가족들은 얼어붙을 것이고 그 사람의 손에는 택배 상자 대신..... 평온한 일요일 저녁, 확인을 하지 않고 택배라는 말에 의심없이 문을 열어준 것이 잘못이었을까.


 우리집은 8층. 복도에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끽. 실제로 이런 소리는 아니었을테지만 그때는 엘리베이터 움직이는 소리가 녹슨 쇠못을 가는 것처럼 거슬렸다.

"문이 열렸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우리집 현관문까지는 일곱 발자국.

"띵동."

인터폰 화면으로 좀전의 헬맷과 고글이 보였다. 보통 택배기사님들은 택배 왔다고 크게 말하면서 문부터 두드리던데, 아니면 초인종을 누른 다음 바빠서 빨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데. 헬맷을 쓴 커다란 얼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초인종만 보고 있었다. 인터폰 화면으로 내가 봤을 때는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과 같았다. 나는 일부러 텔레비전 음량을 높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인터폰을 들어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저.....밖에 두고 가시면 돼요."

목소리 끝이 떨렸다.

커다란 얼굴은 한참 화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초인종을 한번 더 눌렀다. 나는 다시 한번 밖에 두고 가라고 했다. 화면 속 얼굴이 입을 열고 뭐라 중얼거렸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욕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자 나는 인터폰을 껐다.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조심.


 "문이 닫혔습니다."

잠시 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가 갔을까 싶어 인터폰을 다시 켜서 밖을 확인했다. 우리집 초인종은 문앞이 아닌 엘리베이터와 가까운 벽쪽에 달려있어서 사람이 문앞에 서있어도 확인할 수 없다. 나는 현관문 안쪽에서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을 선뜻 열 수 없었다. 그렇게 20분이 흘렀고 옆집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비로소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택배를 가지고 왔다고 했는데 택배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헬맷을 쓴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면서 택배를 가지고 왔다며 우리집 초인종을 눌렀던 것이다.


봄날, 평범한 일요일 저녁에 벌어졌던 택배 사건은 가끔 꺼내는 사소한 에피소드로 잊혀졌지만 그때 짧은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던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도 간담서늘하다고 해야할까. 그때 내가 문을 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택배 왔어요."

우리집 초인종을 누르다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한참 서있던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태풍이 지나간 뒤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자 봄날 저녁에 있었던 작은 사건이 떠올랐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택배기사님들도 비대면 배송을 하고 미리 배송시간을 메시지로 알려줘서 문을 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올봄에도 그렇게 비대면 배송을 했었는데? 그러고보니 일요일에는 원래 배송이 없지 않았었나.


 어쩐지 봄과 비슷한 초가을 저녁이다. 오늘 저녁은 마트에서 산 순희네 빈대떡과 제육볶음, 그리고 막걸리. 어둑어둑해지는 걸 보니 서둘러 밥상을 차려야겠다. 저녁을 먹고는 아마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초인종이 울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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