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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Aug 26. 2020

나는 참 이기적인 사람인가 봐.

토마토 잼을 만들다가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열기에 뺨이 후끈 달아올랐다. 얇은 샌들을 뚫고 발목을 지나 종아리까지 오른 열기는 온몸을 돌아 끈적한 땀이 되어 흘러내렸다. 숨을 쉴수록 숨이 찼다. 마스크 속에서 내쉰 숨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숨을 쉴 수도 쉬지 않을 수도 없이 걷는 여름 한복판에 마스크가 걸려있다. 이번 여름은 이전 여름과 다르다. 예고없는 더위와 장마가 경계를 생략한 채 거침없이 몰아쳤다가 젖어가더니 잠잠하게 물러가는가 싶어 여름 너머를 올려다봤더니 그럴 리가 있겠느냐 비웃기라도 하듯 여름은 다른 계절로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열기를 쏟아냈다.


 축 늘어진 그림자를 붙잡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지하철역 근처에서 장사를 하시는 아주머니에게 토마토 한 봉지를 샀다.

 여름철 과일하면 수박, 포도가 먼저 떠오르는데, 생각해보니 여름 동안 내가 가장 길게 먹는 과일은 토마토인 것 같다. 수박과 포도는 7,8월에 먹고 그친다면 토마토는 6월이 되기 전부터 시작해서 여름이 끝나고도 먹는다. 새콤달콤한 맛이 없어서 어릴 때는 잘 먹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채소와 과일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 잡은 상큼하면서 심심한 그 맛이 편해졌다.


 토마토 파는 아주머니는 겨울을 빼고는 늘 그 자리를 지킨다. 푹 눌러쓴 야구모자에 주머니가 많은 조끼를 입고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한다. 나는 무거운 봉지를 들고 가는 게 싫어서 두세 달에 한번 들르는 정도인데 아주머니는 나를 단골처럼 대한다. 얼굴을 기억하는 건지 모든 손님에게 그러는 건지, 내게 "언니"라고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아주머니의 딸이 토마토 농사를 지어서 그 토마토로 장사를 한다는 사실과 손주가 유치원에 다니는데 장사하느라 돌봐주지도 못한다는 안타까움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대화라기보다는 의례적인 인사에 가까웠다. 이번에도 토마토 봉지를 받아 들고 값을 치르고 가려는데 아주머니의 말이 나를 붙잡았다.

 "세상에 언니, 이번 여름은 왜 이렇게 힘든지 몰라. 며칠 전까지는 비만 그렇게 내리더니 또 이렇게 덥고."

 그 말에 수긍하며 인사하고 가려는데, 아주머니가 봉지에 토마토를 하나 더 넣어주면서 또 나를 붙잡았다.

 "언니, 요즘은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으려니 너무 힘들어. 그래도 나는 다행이야. 이번에 폭우가 쏟아져서 우리 형님네는 난리가 났잖아. 우리 형님이 전남 담양에 사는데 하룻밤 사이에 집이 다 잠겼어. 몇 년이나 걸려서 지은 집인데, 얼마나 아까운지 몰라. 형님이 진짜 강한 사람이야. 나도 강한 사람인데 형님은 더 강해. 그런 형님이 나한테 전화해서 올케 나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냐 하면서 울더라니까."

 아주머니의 표정과 물난리로 힘든 그 형님의 사연에 잠시 멈춰서 폭우와 수해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고 다시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그런데 언니, 나는 이기적인 사람인가 봐." 라며 아주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가려는 방향에 한쪽 발을 내딛고 다른 발은 떼기 직전인 상태로 멈춰 섰다.

 "형님 힘든 건 알겠는데, 그게 내 집이 아니라서 다행이 생각이 드는 거야. 떵떵거리며 자랑하던 형님 집은 잠겼는데 우리집은 괜찮으니까. 우리는 피해 안 입어서 다행이다. 걱정하는 남편 앞에서 내색은 안 했는데, 자꾸 다행이라는 생각만 드는거야. 언니야, 나는 참 이기적인 사람인가 봐."

 사람 마음이 다 그렇지 않겠냐고 이기적이지 않다고 말하며 다시 인사를 한 뒤 나는 발을 떼었다. 내가 걸어가는 뒤통수에 아주머니의 마지막 말이 걸렸다. "남편은 자기 누나라고 돈을 좀 많이 보내자고 하는데 그 돈도 아깝더라고. 언니, 나는 참 이기적인가 봐."

 토마토 봉지를 들고 가느라 조금 전보다 더 축 늘어진 그림자를 겨우 붙들고 걸었다. 한참 나이가 위인 아주머니가 나를 '언니'라고 부를 때의 생경함이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말과 엉겨 붙었다.


 토마토를 샀던 건 이틀 전이다. 집까지 무겁게 들고 온 토마토 봉지를 식탁 아래 두고 잊고 있었다. 오늘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한 부엌에서 봉지를 발견했을 때 어쩐지 열어서 안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토마토는 상하지 않았고 군데군데 짓눌리고 물러있었다. 익히지 않고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아 고민하다 잼을 만들기로 했다. 토마토를 뜨거운 물에 데쳐 껍질을 벗기고 갈아서 냄비에 설탕과 함께 넣고 끓였다. 센 불에 올려놓고 계속 저었다. 붉은 토마토가 끓어오를 때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언니야, 나는 참 이기적인 사람인가 봐."라며 내 발길을 계속 붙잡았던 아주머니의 얼굴-안타까움과 안도가 뒤섞인 묘한 표정이 어려있던-이 떠올랐다.


 토마토는 형태가 바뀌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빛보다 더 붉게 바뀌어갔다. 잼으로 바뀌어가는 토마토가 냄비에 눌어붙지 않도록 계속 저으면서 나는 이틀 전 끝맺지 못했던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혼자 이어갔다.

 진짜 이기적인 사람들은 따로 있어요.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과 숨을 빼앗아갔으면서도 오히려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죠. 모두 마스크를 쓰며 힘겹게 버티고 견디면서 여름의 너머에는 지금보다 좀 더 나을 거라는 희망을 품으며 살아가던 찰나, 광장의 한 복판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광장을 차지한 무리들. 그들이 내뱉은 말과 그들이 내쉰 숨이 광장을 오염시키고 퍼져나갈 때조차 억지논리와 가짜뉴스로 세상을 왜곡하고 침을 튀겨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에서 분노를 느낄 수밖에 군요. 스스로를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당신은 따뜻한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을 꾸미지 않고 밖으로 꺼낼 줄 아는. 진짜 이기적인 사람들은 스스로 그럴 말을 할 줄도 모릅니다.

 광장을 오염시키고 우리가 지켜온 일상을 한순간에 혼란에 빠뜨린 그들의 이기심이 떠올라 더욱 붉게 변하는 냄비 속의 토마토를 힘껏 저어다. 달라붙지 않고 부디 사라져주기를 바라면서. 그러는 사이 토마토의 붉은빛은 잠잠해지고 토마토는 잼의 형태로 바뀌었다.      

                                                                                                                                                                                                                                                                                                                                                                                                                                                            


잼을 만들 때의 마음과 달리 예쁘고 맛있는 토마토잼..토마토는 잘못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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