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먹먹해지더니 가까이 닿는 소리마다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내게 건네는 말이 뭉개졌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가 덩어리져 굴러갔다. 음악이라도 켜면 괜찮을까 싶었지만 낮은 도와 더 낮은 솔을 페달을 밟으며 동시에 누르고 있는 것처럼 무거운 소리가 부우우웅 이어졌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내게서 나는 소리였다. 내가 하는 말은 귓속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머리와 얼굴을 맴돌았고 소리의 진동은 폭을 넓혀갔다.
내게 닿는 세상의 모든 소리는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낮고 깊은 소리로 울었다.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몸에 갇힌 소리를 빼내려고 애쓸 때마다 어디선가 물이 찰랑거렸다.
머리를 감다가 물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것처럼 물이 들어간 쪽을 아래로 향했고, 한 발로 콩콩 뛰어도 봤고, 화장지를 얇게 넣어도 봤지만 물은 빠져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하지 말라는 방법인 면봉을 사용한 뒤로는 살짝 막혔던 소리가 꽉 막혀버렸다.
하룻밤 자는 사이 내 몸속의 소리들이 쉴 새 없이 빠르게 움직여서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었다. 방안은 고요한데 내게 갇힌 소리들은 빠져나가지 못해 아우성을 쳤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고 오직 나에게만 들리는 쉼 없는 소리들, 이것이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 아닐까 싶었다.
아침이 되자 귀에 닿는 소리는 더 커졌다. 물을 한 모금 마시자 더 울렸다. 물에 잠겨있으면서 물을 마신 것처럼. 소리가 빠져나오지 않고 맴돌까 봐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조차 삼켜야 했다.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어떤 소리에도 귀담지 않고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과 주고받은 인사가 울렸다. 밤새 내린 비에 흠뻑 젖은 땅을 밟으며 천천히 걸었다. 흘러내린 흙과 떨어진 열매를 밟는 소리가 울렸다.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가 젖은 지면을 지나는 소리가 울렸다.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는 까치의 파닥거리는 날갯짓이 울렸다. 내가 숨을 쉬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어떤 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다.
병원에 도착해서 이름을 접수하고 기다렸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병원은 한산했다. 내 앞에 치료를 받고 있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진료실에서 평소 무뚝뚝하던 의사의 목소리가 상냥하게 들려왔다. 아이를 어르듯 하나씩 천천히 말하고 있었다. 아이가 왔나 싶어 진료실을 살짝 들여다보니 덩치가 큰 청년이 앉아있었다. 청년은 의사가 말하는 대로 입을 벌려 치료를 받았다. 의사가 주의사항과 약 복용법을 알려주자 큰 소리로 "네.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치료를 마친 다음에는 의자에서 내려와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예의바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내가 진료실 의자에 앉는 사이 청년은 호흡기치료기가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청년 곁에는 어머니가 서있었다. 동네에서 자주 보던 어머니와 청년이었다.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과 늘 그 옆을 지키는 어머니. 처음 봤을 때 아들은 지금보다 몸이 작았고 지금보다 목소리가 컸다. 마트에서 원하는 물건을 사주지 않으면 떼를 쓰거나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묵묵히 흩어진 물건을 치우고 아들을 일으켜 세워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좁은 골목을 지나갈 때면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아 이끌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먼저 가세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럴 때면 나도 고개를 숙인 채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실수로도 두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 세월 반복해왔을 고개 숙인 어머니의 목소리는 지쳐있었다.
길을 가다가 어머니와 아들을 자주 마주쳤다. 아들은 볼 때마다 몸이 커졌고 어머니는 반대로 작아졌다. 아들의 어깨가 넓어질수록 어머니는 좁아졌다. 어른이 된 아들은 더 이상 큰소리로 떼를 쓰지 않는다. 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하게 행동한다. 초로에 접어든 어머니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보폭을 맞춰 걷는다. 어머니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또박또박 예의 바르게 대답한다. 어머니의 칭찬에 해맑게 웃고 숨김없이 기뻐한다. 착한 아들이다. 앞으로 더 착한 아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시간이 허락한다면.
오랜만에 병원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시간의 흐름만 빼면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이다. 내가 진료실에서 나왔을 때 호흡기치료를 마친 아들이 처방전을 받고 계산을 하는 어머니 옆에 서있었다. 어머니가 처방전을 들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이제 약국에 가자."라고 하자, 아들은 "네."하고 대답한 다음 "안녕히 계세요"라며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해 인사했다. 세상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는 목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나는 남은 치료를 받고 처방전을 받아들고서 약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두 사람과 마주쳤다. 아들의 손에는 뽀로로가 그려진 비타민이 쥐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집에 가자고 했다. 약국을 나서기 전 아들은 "안녕히 계세요."하고 또다시 인사를 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약을 받아 들고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내 귀에 닿는 모든 소리가 울렸다. 병원에 다녀오기 전보다 진동의 폭은 좁아졌지만 아직도 울림은 남아있었다. 다행히 내 몸이 내는 소리에 대한 반응은 어젯밤보다 줄어들어 숨을 쉬거나 침을 삼키는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내가 하는 말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와 오랫동안 고였다. 내게로 와 잠시 닿았던 "안녕히 계세요."라는 세상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목소리와 함께.
낮은 하늘 아래로 비가 흩어진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늘지만 우산을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어느새 온몸이 흠뻑 젖을 수도 있는 그런 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