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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Oct 11. 2020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그녀

서로이웃을 끊다

 그녀의 이름은 아름다웠다.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이었다. 나도 가지고 싶었지만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녀에게 훨씬 잘 어울렸다.


 처음에는 이름 때문에 그녀에게 관심이 생겼다. 하지만 그녀의 블로그를 찾아간 뒤부터는 그녀가 보여주는 모든 것에 관심이 생겼다. 시와 소설을 좋아하고 클래식과 재즈를 즐겨 들으며 텔레비전은 싫어하지만 영화와 뮤지컬과 전시회는 일상적으로 즐기는 그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하였으며 따뜻한 성품을 지녀서 아프리카 아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모자를 뜨는 그녀. 초겨울의 붕어빵과 한밤의 와인을 사랑하고 출근하는 남편에게 입 맞추며 손수 만든 도시락을 건네는 그녀. 새하얀 얼굴에 까만 단발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말을 자주 듣고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색인 빨강을 좋아한다는 그녀. 나는 그녀와 서로이웃이 되었다.


 그녀는 말과 행동이 따뜻했다. 블로그에 올린 글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고, 블로그에 올린 집은 심플하면서도 이국적 인테리어를 포인트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스타벅스에 갈 때는 텀블러를 챙기고 채식 위주의 식단을 짜고 일주일에 두 번은 필라테스를 하며 오래된 친구들과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가고 이웃과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이웃길에서 곤경에 처한 어른을 돕는 그녀는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균형을 잃기 쉬운 세상에서 그녀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치에 맞으면서도 공감이 되는 말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그녀는 먼지 속에서도 빛을 찾아 날아가는 나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동경했다. 나도 어쩌면.


 언젠가  그녀가 자신의 긴 글 속에 격하게 감정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평소의 그녀와 다른 모습에 조금 놀랐지만 나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넘겼다. 비판은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라고 여겼으니까. 다만 비판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비난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기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늘 긍정의 힘을 믿는다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던 사람이었다. 이유 없이 그렇게 격한 글을 쓸 사람이 아니었다. 불편한 마음에 글을 건너뛰고 읽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모른 채 지나갔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블로그를 거의 방치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간 내 블로그는 황폐했다. 오래된 글과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 나는 내 블로그를 제쳐놓고 새글 알림을 따라 그녀의 블로그를 반가운 마음으로 방문했다. 그녀는 여전히 많은 글을 쓰고 사진도 부지런히 올리고 있었다. 그림에 조예가 깊은 그녀는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화가의 멋진 그림도 척척 소개하고 클래식과 재즈, 팝과 가요를 오가며 음악적 지식도 선보이고 있었다. 여전히 필라테스를 하고 와인을 사랑하고 있는 그녀는 예전과 다름없이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몇 개의 글과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긍정의 기운을 전파하며 따뜻함이 묻어나는 그녀의 글을 읽다가 몇 개의 이상한 글과 수없이 달린 댓글을 보게 되었다. '이상한 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알던' 그녀가 썼던 글과 너무 다른 느낌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정책과 지도자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쏟아낸 글에서 나는 광복절 집회에서 독재와 빨갱이 타도를 외치던 세력들의 크게 벌어진 입을 다시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댓글도 뭔가 이상했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글에 동조를 하며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려있었고 그중에는 일베가 쓴다는 용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의 글에 반대하는 댓글에는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욕설을 퍼붓는 대댓글과 비난을 퍼붓는 그녀의 답글이 달려있었다. 이게 뭐지. 나는 그녀의 글과 댓글들을 읽다가 머리가 멍해지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누구인가.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이 잘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 대해 나는 무엇을 알고 있었던가. 몇 년 동안 그녀가 보여주었던 따뜻한 삶과 사랑이 넘치던 마음과 부드러운 말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어느 소설에서처럼 그녀도 허구의 인물이었던 걸까.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으로 블로그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성격과 가족과 외모와 취향을 설정하여 새로운 삶을 만들었던 것인가. 내가 알던 그녀가 맞는지 묻고 싶어도 묻을 수 없었다. 대체 누구에게 묻는단 말인가. 댓글로 묻고 싶은 마음을 누른 뒤 나는 그녀와의 서로이웃을 끊었다.


 따뜻한 말투와 닮고 싶은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운 이름의 그녀. 

 일요일 오후가 되면 그녀는 따뜻한 욕조에서 긴 목욕을 한 다음 와인을 마시고 재즈를 들으면서 러시아 소설을 읽는다고 했다. 지금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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