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면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서 찜질팩을 달고 사는데 반신욕을 하면 효과가 좋다는 말을 들었고, 그 정보를 접했던 이동식 욕조가 놓여있는 화면 속 집이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동식 욕조는 이틀 만에 배송되었다.
상자가 아닌 뽁뽁이와 비닐로 꼼꼼하게 포장되어있었다. 가위로 비닐을 자르고 뽁뽁이를 풀면서 앞으로 욕조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뜨뜻한 물을 받아놓고 욕조에 앉아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상상했다. 손발이 따뜻해지고 뺨에 생기가 돌 때까지 욕조에 앉아있으면 딱딱해진 어깨와 쌓인 피로가 풀릴 것 같아 벌써부터 느긋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포장을 벗겨내고 스르륵 이동식 욕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결 무늬가 있는 아담한 사이즈의 크림색 이동식 욕조.
내가 쇼핑몰에서 몇 번이나 확인하고 주문한 욕조가 분명했다. 길이와 높이, 색깔 주문번호도 틀림없이 맞는데 어쩐지 다른 욕조처럼 보였다. 쇼핑몰 화면으로 봤던 욕조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택배로 우리집에 도착한 욕조는 전혀 이국적이지 않았다.
다시 쇼핑몰로 들어가 확인해보니 욕조가 놓여있는 배경부터 차이가 많았다. 화면 속 욕조는 그림이 걸린 새하얀 벽을 배경으로 코코아색 카펫에 놓여있었다. 작은 하얀색 테이블에는 물에 담긴 초록 식물이 있고 그 옆에는 심플한 형태의 옷걸이, 옷걸이에는 샤워 가운이 걸려있었다. 같은 욕조라도 어디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욕조는 우리집에 온 순간 전혀 이국적이지 않은 욕조로 바뀌었다. 스튜디오처럼 산뜻하고 배경도 상큼한 소품도 없는 이곳에서 순식간에 초라해졌다. 그래도 제자리를 찾아 욕실에 놓이면 괜찮을 거라고 앞서 위로하며 욕조를 옮겼다.
이동식 욕조는 플라스틱 재질로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한 손으로도 쉽게 들렸다. 나중에 이사 갈 때도 가벼워서 편하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샤워기 아래 공간으로 욕조를 밀어 넣었다. 욕조는 기막히게도 딱 들어맞았다. 너무 딱 들어맞아서 빈틈이 전혀 생기기 않아서 욕조 안에 들어가서 샤워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샤워를 해도 불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욕조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욕조가 너무 가벼워서 손으로 잡지 않으면 넘어질 것처럼 덜컹거렸다. 높이도 일반적으로 설치된 욕조보다 높았기 때문에 손으로 욕조 테두리를 손으로 누르면서 욕조를 낮은 담을 넘는 것처럼 다리를 번쩍 올려 들어갔다.
이동식 욕조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는 '물을 채우면 무게가 있어서 안정감이 생길 거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면서 욕조에 앉아보았다. 욕조는 길이가 너무 짧았다. 다리 짧기로는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내가 앉아서 다리를 뻗어도 무릎을 굽혀야만 했다. 기댈 수 있도록 뒤로 누운 각도로 되어있어야 편할 텐데 거의 직각에 가까운 각도에 목과 등이 불편했다. 바닥도 너무 얇아서 엉덩이가 배겼다. 그래도 물을 채우고 앉으면 괜찮을 거라고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반신욕 하려고 샀으니 그 목적만 충족시키면 충분하다고 또다시 스스로를 위로하며 욕조를 세제로 깨끗이 닦아내고 따뜻한 물을 채웠다. 샤워기를 틀어놓고 한참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반신욕을 하기 위해 욕조에 들어갔다.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느긋하고 여유로운 반신욕의 시간을 즐기려 했다.
욕조에 채운 물은 너무 빨리 식었다.
바닥부터 식었다. 물 온도가 쉽게 낮아져서 계속 샤워기의 따뜻한 물을 틀어야 했다. 느긋하게 반신욕을 즐길 여유 비슷한 것도 생기지 않았다. 10분이라는 시간을 겨우 채우고 나는 욕조에서 나왔다. 그리고 욕조에 발이 닿는 위치에 있는 배수 마개(욕조 바닥에서 3cm 정도 높이에 있었다)를 열었다. 물은 천천히 빠져나오다가 욕조 바닥이 드러날 때쯤에 흐름을 멈추었다. 배수구멍이 바닥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으니 바닥에 있는 물을 빼려면 욕조를 뒤집어야 했다. 나는 욕조를 뒤집어 물을 빼내고 샤워기 아래 세워두었다.
이동식 욕조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몇 번 반신욕을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샤워를 할 때도 불편해서 결국 욕실에서 쫓겨난 이동식 욕조는 거실로 나왔다. 나는 햇빛이 드는 거실 창가에 욕조를 두었다. 가족들은 거실에 무슨 욕조가 있냐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이동식 욕조가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반신욕을 목적으로 샀던 욕조가 욕실에서 불필요하게 된 상황에 어디에 둬야 할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거실에 한참 그대로 두었다. 효리네 민박에서 2층에 자리 잡고 있던 이동식 욕조는 예뻐 보였는데, 우리집 이동식 욕조는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뚱미를 뽐내고 있었다.
이동식 욕조에서 잘 놀았다.
거실에 생뚱맞게 자리를 잡은 이동식 욕조 때문에 가족들의 잔소리를 받아내면서도 나는 아직 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를 대며 그것을 그대로 거실 창가에 두었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 앉아 잘 놀았다. 목과 등이 딱딱하고 엉덩이가 배겼기 때문에 쿠션과 방석을 깔고 책을 읽고 휴대폰을 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봤다. 물론 아무도 없을 때 그런 일을 했다. 나는 재택근무로 하루 서너 시간 정도의 일만 하고 있기 때문에 집에 아무도 없을 때는 자주 욕조에 들어가서 놀았다. 무릎을 굽혀야 했기 때문에 불편해서 오래 앉아있지는 못했지만 욕조에 앉아있으면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방석과 쿠션과 담요까지 갖춘 욕조에 딸이 가끔 들어가서 놀았다. 게임을 하고 전화를 하다가 불편한데 재미있다는 말을 하고는 금세 욕조에서 빠져나왔다.
이동식 욕조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거실 창가에 욕조가 있으니 집이 어수선해 보이고 눈에 거슬린다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욕조를 베란다 구석으로 옮겼다. 베란다에는 빈 화분과 공구상자와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여있다. 그 물건들 사이로 이동식 욕조를 넣었다. 빨래가 걸려있는 베란다의 구석에 이동식 욕조가 있다. 시간이 가면서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욕조에 쌓여갔다. 시간의 그림자를 덮으며 이동식 욕조는 점점 존재감을 잃어갔다. 베란다에 나갈 때마다 나는 이동식 욕조를 본다. 처음에는 어울리는 자리를 어서 잡아줘야겠다는 생각을 줄곧 하다가 언젠가부터는 원래 그곳이 제자리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이동식 욕조를 버리는 건 어때.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내가 이국적인 풍경을 꿈꾸며 샀던 이동식 욕조에 재활용 스티커를 붙여서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불편하고 쓸모없지만 언젠가는 어울리는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이동식 욕조는 반신욕을 하기에는 불편해도 작은 놀이터로 쓰기에는 무척 좋았다. 너무 가벼워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바닥이 딱딱했지만 방석과 쿠션을 깔면 그런대로 괜찮았다. 목욕만 하지 않으면 욕조는 쓸만했다. 목욕을 하지 않으면 욕조는 어디서든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목욕만 하지 않는다면 욕조는 시간을 보내기에 제법 재미있는 공간이 되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 욕조를 거실에 두고 놀고 싶은 나의 실행을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지만.
베란다에 있는 이동식 욕조가 오늘따라 눈에 들어온다. '넌 아니야. 반신욕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그러니까 나를 설득하려 하지 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동식 욕조가 있는 베란다 구석으로 가서 욕조 안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반신욕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나의 자체적인 판정을 받았지만 다른 용도로 쓸 수는 있겠지. 아직 욕조가 놓일 자리도 정해놓지 않고 어쩌려는 건지.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져 그렇다는 탓을 해보며 나는 이동식 욕조를 들어 올린다. 여전히 가벼워서 어디로든 이동이 쉬운, 그렇지만 우리집 어디에 놓아도 어울리지 않는 욕조. 이번에는 가능할까. 제자리를 찾는 게.
임시로 거실에 놓인 이동식 욕조가 커다란 컵처럼 보인다. 오늘 같은 날씨에 따뜻한 반신욕을 하면 좋을 텐데 저 욕조는 반신욕을 빼고는 뭐든지 가능해서, 그게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