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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Oct 27. 2020

내 꿈에 딸이 울었다

꿈 속의 꿈

  새벽에 방에서 나갔냐고 묻는 딸에게 나는 꿈에서 깬 뒤 잠이 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낯선 곳에서 눈을 떴어. 아주 긴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어. 뜨고 싶지 않았지만 겨우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어. 어두침침하고 흐릿한 분위기에 선명한 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추상적인 느낌의 세계가 있었어. 여기가 어디지. 나는 몸을 일으켜서 걷고 싶었어. 너무 오래 누워있었는지 온몸이 뻐근해진 느낌이 들었거든.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지. 그런데 그럴 수가 없는 거야. 팔이, 그러니까 몸이 없었거든. 나는 내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몸은 보이지 않는 거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처럼 명확한 형체 없이 공기를 떠다니는 가벼운 덩어리만 느껴졌어. 그때 목소리가 들렸어. 이제야 깨어났느냐.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기둥의 그림자처럼 커다랗고 길쭉한 것이 있었어.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 내게 그것은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자서 이곳이 어디인지도 잊어버린 것이냐.’고 말했어. 무슨 말이냐고 묻자, 그것은 이상한 말을 했어.

 “너는 아무것도 아닌 無 자체, 인간들 사이를 떠도는 기억의 조각이나 꿈의 흔적을 흡수하는 존재, 인간이 흘리고 버린 감정과 무의식을 흡수하다가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인간을 모방하다가 인간의 삶을 꿈꾸었던 존재. 결국 간절한 소망으로 꿈 하나를 얻어낼 수 있었고 너는 아주 오랫동안 그 꿈을 꿨어. 오랜 시간 수없이 깨웠지만 꿈에 달라붙은 네 소망을 떼어내기 어려웠어.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네가 꿈에서 깼어. 꿈은 충분하니 그만하겠다는 뜻이겠지. 잘 돌아왔어. 인간을 꿈꾸는 건 어리석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을 꿈꾸다니.”

 나는 그것에게 달려들며 거칠게 말했어.

 “거짓말. 조금 전까지 나는 우리집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어. 수많은 세월의 기억이 있고 기쁨과 슬픔이 다 느껴지는데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니. 내게는 가족이 있어. 어젯밤까지도 나는 그들과 여느 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어. 이건 꿈이야.”

 그것은 목소리를 높였어.

 “지금이 진짜. 네가 오랜 세월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세계가 꿈.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인간의 삶을 꿈꾸면서 시간만 헛되이 보내고도.”

 나는 소리를 질렀어. 어떻게 생생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꿈일 수 있느냐며 돌아가게 해달라고 울기도 했지. 그러면서 다시 꿈을 꾸기 위해 눈을 감았어. 감다니. 형체가 없는데 어떻게 눈을 감지. 울고 있지만 눈물을 흘릴 눈도 없다는 것에 나는 슬펐어. 그래서 간절히 빌었어.

 “다시 돌아가게 해주세요. 인사를 못하고 왔어요.”

 순간 검은 기둥의 그림자처럼 크고 높은 그것의 어둠이 더 짙어졌어.

 “부질없는 짓. 소용없는 일. 네가 오래 머물렀던 인간으로서의 꿈은 깨어난 지금 이 순간부터 깨어졌고, 다시는 같은 꿈을 꿀 수 없어.”

 나는 꺼져가는 목소리를 되살려 간신히 말을 했어.

 “다시 꿈을 꾸고 싶어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동굴처럼 깊게 울리는 한숨. 갑자기 추상적인 세계가 흔들리며 그것의 어둠이 녹아 흐르기 시작했어. 세계는 어둠으로 차올랐고 나는 눈을 감았어. 짜고 아릿한 액체가 뺨에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어.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이 방에 누워있었어. 옆에서는 새근거리는 네 숨소리가 들렸고 벽시계는 재깍재깍 열심히 초침을 움직이고 있었어. 나는 일어나서 네 얼굴을 한참 들여다봤어. 돌아왔구나. 안심이 되었지만 더는 잠을 잘 수가 없었어. 그래서 새벽에 거실로 나갔던 거야.      


 흑. 우는 소리. 내 팔을 베고 누운 딸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울음소리만 들렸다. 아아아아아. 지금보다 훨씬 아이였을 때 내가 장난으로 아픈 척을 하면 세상 끝난 것처럼 울었던 그때처럼 서럽게 울었다. 아가야 왜 울어. 딸의 얼굴을 보려했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딸을 보듬어 등을 천천히 쓸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얼굴을 가린 손을 떼어내고 눈물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울지 말라고 했다. 딸은 슬픈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까만 속눈썹이 젖은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고 각진 구석이 없는 동그란 뺨은 젖어있었다.

 “그런 꿈 꾸지마. 이게 엄마가 꾸는 꿈이면 너무 슬퍼.”

 딸의 울음이 또다시 터졌다.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아아아. 꿈에서 인간의 삶이 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내 꿈을 씻어내려는 듯 크게 울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꿈이야. 미안해. 울지 마. 다시는 안 꿔.”

내 꿈을 듣고 우는 딸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냥 꿈’이라고 말하는데 어쩐지 나도 슬퍼졌다. 다시는 이런 슬픈 꿈 이야기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딸을 꼭 껴안았다.     

 

 장자의 호접몽과 비슷한 맥락의 꿈에서 내가 살았던 모든 삶이 꿈이며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 슬펐다. 행복했던 순간보다 그렇지 못한 순간이 많았던 인생이라 언제 날개를 접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꿈속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슬픔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차올랐다. 나는 다시 꿈꾸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다시 이렇게 돌아왔다. 내가 돌아오고 싶었던 곳으로. 어쩌면 꿈일지도 모르는 내 소망이 만들어낸 이 삶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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