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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Nov 20. 2020

달고 뜨거운

 눈송이가 떨어진다. 얇은 외피에 비해 낙하속도가 빠르다. 손등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실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녹는다. 다음 그 다음의 눈송이가 마치 순서가 있는 것처럼 넓게 펼친 손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손등보다 체온이 높은 곳에서 그것은 ‘닿았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바로 녹는다. 차갑다는 느낌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나는 훼손된 눈송이를 응시하며 본래 눈송이가 가지고 있었을 무게를 가늠해본다.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올려다보니 크고 탐스럽다. 한때는 세상 모든 것이 그러했을 것처럼 눈송이의 형태는 무구하고 선명하다. 팔을 벌리고 입을 열어 눈을 맞이한다. 차가운 것이 몸 여기저기 부딪히다 입 속으로 들어온다. 혀를 적셔주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것을 삼키고서 나는 손바닥에 남아있던 미지근한 눈 얼룩을 문지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눈송이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다. 아마도 세 번째 이후의 기억들도 지워지게 될 것이다. 기억의 무게를 생각할 때면 얼룩으로 사라진 눈송이가 떠오른다.      


 좁고 가팔랐던 계단의 첫 번째 모퉁이를 돌 때 얇고 성긴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살갗에 닿을 때 금세 녹던 눈송이는 시멘트 계단에서는 녹지 않았다. 계단은 분절된 음처럼 짧은 단위로 끊어져서 모퉁이가 자주 나왔다. 아버지는 무거운 물통을 양손에, 나는 가벼운 종이상자를 품에 안고 좁은 모퉁이를 돌아 다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다섯 번째 모퉁이를 돌 때 눈은 얇은 층을 이룰 정도로 쌓여갔다. 그제야 아버지는 양손에 든 물통을 잠시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뒤따르던 나도 상자를 잠시 내려놓고 살짝 곱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해가 기우는 운동장 구석에는 얼어붙은 나뭇가지가 솟아있었고 가까운 곳에서 배고픈 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오래 쉬면 더 힘이 든다고 하시며 다시 양손에 물통을 들었다. 장갑을 끼었지만 차가워진 손에서 힘이 빠지는지 아버지는 물통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계단을 올랐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둘 다 절벽을 오르듯 몸을 앞으로 한껏 숙이고서. 건물 외부로 나있는 계단은 길었고 물통 속의 물은 찰랑거렸고 겨울하늘의 눈송이는 포근했다. 

목적지는 계단 끝에 있는 도서관 휴게실 커피자판기였다. 당시 아버지는 전문대학에 있는 커피자판기를 몇 대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점검했다. 아버지가 하루에도 몇 번씩, 학생들 시험기간에는 그보다 더 자주 오르내리던 계단을 내가 따라간 건 아마 서너 번쯤 아닐까. 


 휴게실에는 몇몇 학생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버지는 눈인사를 건넨 뒤 물통을 내려놓았다. 진한 크림색바탕에 선택버튼이 아홉 개나 있는 커피자판기는 다른 곳보다 훨씬 맛있는 커피가 나올 것 같은 다소 설레는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가 열쇠로 자판기를 열자 플라스틱 통과 선들로 연결되어 있는 내부가 드러났다. 낭만적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기능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비어있는 통에 커피, 설탕, 크림을 비롯해 코코아, 율무차, 우유 재료, 마지막으로 무겁게 들고 온 물을 채워 넣었다. 대부분 학교 수돗물로 자판기 물을 사용했는데 아버지는 늘 약수터에서 길어온 생수로 자판기 물을 채웠다. 당신이 관리하는 자판기에 대한 아버지 나름의 원칙 같은 것이었다고 본다. 자판기에도 ‘생수 사용’이라고 적힌 종이를 붙여놓을 정도로 깨끗한 물을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으셨던 것 같다. 자판기 내부를 정리한 뒤 아버지는 동전 통을 열어 가져온 봉지에 동전을 담고 자판기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걸레로 자판기 주변 바닥에 흘러내린 커피나 말라붙은 갈색 얼룩을 닦고 종이컵에 담긴 담배꽁초와 쓰레기를 비웠다. 모든 정리가 끝나면 아버지는 동전을 넣어 밀크커피를 하나 뽑아서 내게 건넸다. 늘 고급커피였다. 얇은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천천히 마시면 달고 뜨거운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눈송이가 달라붙은 검은 유리창으로 바깥은 보이지 않고 휴게실 내부만 보였다. 그곳에는 자판기를 닦고 있는 아버지와 불빛으로 반짝이는 커피자판기와 종이컵을 든 내가 있었다. 진한 카페인이 혈관을 타고 흐를 때 하루의 끝이 나를 물들였다. 나는 그 순간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집에 돌아오면 방바닥에 신문지를 펴놓고 동전을 쏟아 세었다. 동전으로 쌓아올린 탑은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기쁨이었다. 아버지는 자주 웃었고 그만큼 자주 말했다. 하지만 학교 측과의 불화로 커피자판기에서 손을 뗀 후에는 웃음과 말이 줄었다. 삶의 접착면을 넓히기 위한 몇 차례 노력이 허물어진 뒤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는 사이 시대가 변하고 커피자판기가 줄어들고 기억은 희미해지고 말은 사라졌다.


흘러나오지 못한 말은 가슴에 남아 단단하게 굳는다. 닫힌 입술과 닫힌 표정은 그렇게 굳은 말들의 상흔이다. 눈송이가 녹던 시간만큼 쉽게 지워진 기억은 어딘가에서 굳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먼 곳에 내리는 눈은 잘 보았지만 가까운 곳에 앉아있는 이의 머리에 내리는 눈은 못 보았다. 기억은 귀 기울여 듣고 붙잡는 사람만이 무게를 잴 수 있는 것이니까. 


 인적이 드문 곳에서 커피자판기를 발견했다. 그곳에 오래 서있었던 듯 낡고 초라했다. 지갑 속에서 겨우 동전을 찾아 좁은 구멍에 넣었다. 찰칵찰칵. 동전이 낙하하는 소리마다 검은 유리창에 비친 아버지와 내가 지나간다. 달고 뜨거운 커피가 기억의 무게를 붙잡는다.     


 



 하늘이 무겁습니다. 며칠 사이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아침을 걷는 코끝이 시립니다. 오랫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문득 올해 첫눈이 언제 올지 궁금해지네요. '내린다'가 아니라 '온다'는 말을 쓰는 건 간절한 기다림이 깃들었다는 뜻이겠지요. 눈이 내릴 때쯤이면 떠오르는 기억을 글로 적었습니다. 내일은 김장김치를 가지러 부모님 댁에 갑니다.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부모님을 부르겠지요. 엄마는 늘 엄마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데, 아빠는 이제 아버지라고 불러야하지 않나 가끔 고민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르면 어쩐지 아빠가 서운해하실 것 같습니다. 평생 아빠라고 불렀고 여전히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언젠가부터 마음속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작년 <에세이문학>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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