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앉아, 함께 먹는 따뜻한 수프 한 그릇

임솔아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by 페이지

한동안 '효리네 민박'을 엄청 열심히 본 적이 있다. 그때 윤아가 만든 수프가 너무 맛있어보여서 처음으로 직접 수프를 만들어봤다. 감자와 양파, 버터를 사용해서 만든 수프는...생각보다 '정말' 맛있었다. 내 스스로는 '돈 받고 팔아도 될 정도'라고 생각했다.

따뜻한 수프를 떠서 한입 넣으면 차가운 뺨에 온기가 돈다. 뾰족하게 섰던 마음 속 가시가 무뎌진다.

나에 대해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규정했던 무례하거나 무신경한 사람들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마저 든다.



나는 혼자 오는 손님들을 좋아했다. 그들은 골똘히 수프를 바라봤고 골똘히 수프를 먹었다.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서 허공을 응시했다. 오래도록 입을 우물거렸다. 입안에서 혼잣말을 웅얼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은 나도 수프 한 그릇을 떠서 각자 떨어져 앉은 손님들 사이에 앉고는 했다. 혼자라는 느낌도 함께라는 느낌도 들지 않아서 좋았다. 혼자서 식사하는 손님은 매출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테이블 회전도 좋지 않다고 언니는 말했다. 일인용 탁자를 합쳐 사인용 식탁으로 만들고 세트 메뉴를 새로 개발했다. 모든 손님에게 언니는 말을 걸었다. 수프 맛이 어떠냐고 물었고, 나를 자랑했다. 나를 도우러 내려온 자신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중


작년 겨울, 우리 동네에 예쁜 빵집이 생겼다.

깔끔한 파스텔톤의 간판 아래 햇살이 비쳐드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갓 구운 빵 냄새가 풍겨났다. 유기농 밀가루를 사용하며 설탕과 버터와 유화제 같은 첨가제를 넣지 않는 건강한 빵을 만든다는 말을 자신있게 하는 빵집 주인의 얼굴은 행복했다. 빵집에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붐비는 경우는 없었지만 사람이 멈추는 경우도 없었다. 빵집 가까이 살면, 갓 구운 빵에서 나는 냄새만으로 즐거워질 때가 있다.

이번에 그 빵집에서 새로운 메뉴를 출시했다. '따뜻한 양파수프' '포근한 감자수프'와 샌드위치와 커피로 구성된 세트메뉴까지.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수프를 단독으로 주문해본 적은 없다. 수프는 딸려나오는 음식 정도로 생각해왔다. 요즘은 수프를 따로 주문해야 하는 곳이 많다. 인스턴트 크림수프 말고 직접 육수를 내서 만드는 수프는 가격도 제법 있다. 그럼에도 빵 냄새가 풍기는 빵집에서 따뜻한 수프 한 그릇이라면 다른 메뉴의 도움 없이 그 자체로도 훌륭할 것 같다.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의 주인공 기정은 수프 카페 '오디너리' 의 1대 청년사장이다. 수강생에게 식당을 열어준다는 셰프 양성 프로그램 광고를 보고, 커리큘럼에 따라 요리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무급으로 이 년 동안 식당에서 근무를 했다. 외식 창업 과정을 모두 이수한 기정은 아카데미에서 마련해준 충북 괴산 칠성면의 면사무소 건물에 마련된 수프 카페의 사장이 되었다. 하지만 말이 사장이지 숙소의 월세와 식비, 관리비를 빼면 수중에는 오십만 원 정도만 들어왔다.


기정이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들도 거의 없었다. 수프 카페의 모든 기물을 비롯해 영업시간과 수강생 수업을 해야한다는 의무도 아카데미에서 결정했다. 그럼에도 기정은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닌 것 같은' 수프 카페의 느낌을 좋아했다.

고요하고도 따뜻한. 수프 카페에는 그런 느낌이 은은하게 퍼져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보낸 윤선미라는 여자가 나타나면서 기정이 좋아하던, 카페의 고유한 분위기는 깨졌다.

기정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윤선미를 언니라고 불렀고, 윤선미는 기정을 '돌봐주어야 하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리고 윤선미는 자신이 겪은 과거의 아픔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자신의 이야기로는 부족한지 기정에게도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기정은 자신에 대해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 윤선미는 혼잣말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기정이 했던 일들을 대신하며 수프 카페를 자신의 방식대로 바꾸었다. 메뉴를 바꾸고 블로그 인증 이벤트를 시작하고 음악을 바꾸었다. 그리고 독서모임을 기획했다.


한식에 익숙한 주민들을 고려해 메뉴에 죽을 추가했고, 블로그 인증 이벤트를 시작했다. 조용했던 가게에 언니의 플레이리스트가 흘러나왔다. 언니는 오전 시간을 이용해서 '나를 구하는 독서'라는 독서 모임을 기획했다. 참가비 만원을 내면 '몸이 행복한 수프 한 그릇'을 제공하는 모임이었다. 독서 모임 안내문을 가게 유리문에 붙였다. 면사무소와 잡화점, 슈퍼 사람들에게 안내문과 함께 수프를 한 그릇씩 배달했다. 나를 돌보고 있다고,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고 언니는 그들에게 말했다.

-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중


첫 독서모임에 모인 마을 주민들은 <선원, 빌리 버드>에 나오는 빌리 버드의 숭고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상의 부조리 때문에 목숨을 잃으면서도 의연하게 감내하는. 그러면서 현대에는 빌리 버드가 행한 선한 폭력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한다.

기정은 묻는다.

"선한 폭력이라는 건 누가 판단해요?"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편한 질문이라 생각했는지 사람들은 기정의 질문을 못 들은 척했다. 윤선미는 기정이 '사회성이 떨어져서 말을 어눌하게 한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때부터 윤선미는 기정을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몰고 갔다. 기정의 걸음걸음부터 아침을 거르는 습관까지, 모두 고쳐야할 문제가 되어갔다. 윤선미는 기정을 처음부터 제대로 가르쳐주고 돌보아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처럼 기정이 잘못하거나 아픈 순간을 포착해서, 가르치고 베푸는 사람의 역할을 하려고 했다.


기정은 수프 카페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수프 카페.

처음부터 아카데미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세운 수프 카페에서 기정은 점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정은 수프 카페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양파수프를 끓인다. 자신을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고, 자신의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면들로 정상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을 채웠던 윤선미를 위한 수프였다. 윤선미는 선의와 다정이라는 허울로 기정을 가두려했지만, 기정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거부하지 않은' 유일한 존재였다.


흐물흐물하고 물컹물컹해진 양파를 집어 맛을 보았다. 달콤했다. 볶은 양파에 육수를 붓고, 코냑을 붓고, 밀가루를 넣고, 다시 끓였다. 언니가 가장 좋아하는 그릇을 꺼내 수프를 담았다. 수프 위에 그뤼예르 치즈를 갈아 올린 후, 오븐에 넣었다. 양파 수프가 구워지는 동안 식탁에 앉아 사직서를 썼다. 오븐에서 알림음이 들려왔다. 그릇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숟가락을 옆에 두었다. 언니의 방문을 열었다. 언니는 입을 조금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언니는 잠든 채 웃고 있었다.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중


나와 다른 타인의 세계를 비정상이라 규정한 채 건네는 위로의 말은 때로 상처로 돌아오게 된다.


적대적이지만 다정한 사람들은 나쁜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선한 미소를 짓고 긍정의 신호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정작 핵심에 다가가면 적대적인 미소를 굳이 숨기지 않는 사람들.

나는 어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까. 그들이 적대적이지만 다정한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면, 건네는 위로에 '우월감'이 숨어있는지 살펴보자. 그런 위로는 받으면 받을수록 나를 낮아지게 하고 내 안의 상처를 벌어지뎌 아프게 하니까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따뜻한 수프 한 그릇 먹고 싶다. 일인용 탁자에 혼자 앉아서, 꾸밈없이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먹는 따뜻한 수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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