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을 팔아 배를 채울 것인가.

김성중 <국경시장>

by 페이지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국경시장이 열린다.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진귀한 음식들이 가득한 곳. 하지만 아무나 먹을 수 없다. 우리가 가진 일반적인 화폐로는 값을 치를 수 없다. 오직 '소년들이 강에서 잡아올린 물고기의 비늘'로만 값을 치를 수 있다. 하지만 물고기의 비늘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기억을 팔아야 한다. 한번 팔아버린 기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기억을 팔아 국경시장의 모든 것을 맛볼 것인가.

보름달이 뜨는 밤, 내가 가진 기억들을 꺼내서 길게 펼쳐보자. 그런 다음, 사라져도 슬프거나 괴롭지 않을 기억들을 골라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그것들의 무게는 팔아도 될 정도로 가벼운지 가늠해보자.





오래전, 남국에 있는 흙빛의 강을 건너고 있을 때 나는 두려웠다.

관광객을 위한 이벤트에 참여해서 보트를 타고 작은 섬 근처의 바다를 돌며 열심히 노를 젓고 있던 중이었는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강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물은 흘러 흘러 바다로 가는데 우리는 강으로 들어와 버렸다. 관광객들이 모여있는 섬의 중심으로 가려면 방향을 돌려야 했는데 강의 폭이 좁아 쉽지 않았다. 강을 계속 따라 들어가면 마을이 나올 터였다.

우리가 탄 배의 반대 방향에서는 원주민들의 배가 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오는 원주민들과 계속 눈이 마주쳤다. 눈이 너무 자주 마주쳐서, 눈빛이 너무 깊게 얽혀서 두려웠다. 혹시 이들이 우리를 납치해서 몸값을 요구하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과 함께 영화에서 보았던 끔찍한 장면들이 노를 저을 때마다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원주민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 했었는데, 끝내 알아듣지 못했다.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강을 향해 손짓을 하기도 했다. 강을 향해 손을 내리꽂는 모습이 무서웠다. 강에 악어가 있다는 것인지 우리를 빠뜨리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소통이 불가한 가운데 나는 그들 대신 강을 들여다보았다.


탁한 초록빛이 감도는 강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방향을 돌려 강에서 바다로 나와 관광객들을 만나기 전까지 실제로 벌어지지 않을 온갖 공포에 휩싸여서 어쩔 줄 몰라하던 그때, 나는 원주민들의 표정에서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고... 기억한다.


소설 <국경시장>에서 주코와 로나와 '나'는 우연히 국경시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N국의 국경 근처에 있는 메카데라는 보잘 것 없는 시골마을에서 일주일 동안 술을 마시면서 각자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타인이자 여행자들이었으니 비밀을 털어놓기 적당한 상대였다.

주코는 두꺼운 책만 읽다가 생활에 무능한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비밀을.

로나는 전 세계를 떠도는 사실이 슬프며 팔목에 새겨진 절망의 세 눈금의 비밀을.

'나'는 다른 일을 찾지 못해 요리사가 됐으며 트라조돈(항우울제)을 이 년째 복용중이라는 비밀을.


너무 한 곳에 오래 머물렀고 더 이상 나눠야 할 비밀도 없었기 때문에 셋은 각자 자신만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기위해서는 비자연장이 가능한 국경 너머 P국에 가야한다. 하지만 국경지점의 출입국 관리소가 비어있어서 그들은 N국과 강을 마주보고 있는 P국으로 건너갈 수 없었다.

다시 N국으로 돌아가는 길, 그들은 강을 따라 걸었다. 올 때와 똑같은 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마을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지 않았다. 주위 풍경도 어딘가 달라보였다. 겨우 숲길을 빠져나왔을 때, 그들은 보름달이 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강에서는 벌거벗은 소년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길을 헤매다 배가 고파진 그들은 요기할 곳을 찾는다. 한 소년이 국경시장에 가라고 알려준다. 지도에도 없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국경시장.


"보름달이 뜰 때마다 장이 서요!"

"뭐든지 다 있어요!"

"우선 물고기를 사야 해요."

"우리가 잡은 물고기들이요."

한꺼번에 대답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우리는 어리둥절했다. 소년들의 눈빛에서는 호의와 악의 중 어떤 신호도 읽어낼 수 없었다. 물고기를 사달라는 뜻일까? 하지만 지갑에서 돈을 꺼냈을 때 아이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팔 수 없으니 시장에서 사라는 것이다.

-<국경시장> 중-


그들은 소년을 따라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넜다. 강둑에 올라서자 각각 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돌로 된 사면상이 눈에 들어왔다. 성별과 감정이 모호한 사람의 얼굴이 새겨진 사면상 때문에 시장이 아니라 '신전의 입구'처럼 보였다. 온갖 것이 다 있는 국경시장은 화려하고 풍성하고 이국적인 정취를 풍겼다. 사람들로 붐비는 골목에서 그들은 식당을 찾아 들어간다.


우리는 식당을 찾아 나섰다. 행인들과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발짝을 뗄 수 없는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간이 탁자와 접이용 의자들로 가득한 장방형의 광장이 나왔다. 노천식당이 늘어선 광장은 저녁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빈 탁자를 차지한 우리는 음식을 잔뜩 주문했다.

찹쌀을 넣고 끓인 해물죽, 발효야채와 알요리, 향신료를 넣고 뭉근하게 끓인 고기전골, 새콤한 냄새를 풍기는 과일조림이 차례로 올라왔다. 김이 오르는 음식을 대하자 모두들 말도 없이 먹기에 바빴다. 음식은 여행지에서 먹어본 어떤 요리보다 맛있었다.

문제는 계산이었다.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에 가자 식당 주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국경시장> 중


국경시장에서는 돈이 필요 없었다. 오직 소년들이 강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 비늘로만 값을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물고기 비늘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아닌 사람의 기억으로 값을 치러야만 했다.

주코와 로나와 '나'는 물고기비늘을 알지 못했기에 음식값을 치르지 못해 당황하고 있었다. 그때 중국식 상의를 입은 남자가 빌려준 비늘로 값을 치른다. 남자는 그들 셋을 데리고 '기억을 팔아서 물고기 비늘을 살 수 있는' 환전소에 간다.


누구의 기억을 팔 것인가?

책만 읽어서 무능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말했던 주코가 먼저 나섰다.


"언제의 기억을 파실 건가요?"

이런 상황은 주코가 읽은 수백 권의 책에서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대답이 늦어지자 환전상은 백화점 직원처럼 사근사근한 말투로 일러주었다.

"대개 첫 거래에서는 출생부터 두세 살까지의 기억을 팝니다만."

"좋습니다. 어차피 생각도 나지 않는데. 팔겠습니다."

주코는 커튼이 쳐진 내실로 안내됐고 남은 우리는 밖에서 기다렸다. 오 분이나 지났을까. 주코는 위락 앉은 소파로 걸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안에서의 일을 묻자 "긴 의자에 누워서 이마에 오일을 바른 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아"라고 답했다. 환전상은 수조에서 손바닥만 한 물고기 두 마리를 꺼내 기름에 튀기더니 비늘이 든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국경시장> 중



기억을 팔아서 받은 물고기비늘로 주코는 책을 사고 그들은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다. 취기가 오르자 이번에는 로나가 갑자기 나가더니 물고기 비늘이 잔뜩 들어있는 주머니를 들고 돌아온다.

어떤 기억을 팔아서 비늘을 받아왔냐고 묻는 주코에게 로나는 '세 개의 눈금이 생기던 해의 기억들'을 팔아치웠다고 대답한다. 로나가 자살을 시도했던 해의 기억들이었다.


'그러면.... 자살하려던 순간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거야?"

"자살이라고? 내가?"

로나는 입을 벌리고 머리 위의 전등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진짜로 기억 안 나. 그렇다면 물고기 비늘보다 멋진 건 그 빌어먹을 시간이 내 인생에서 사라진 거네.

-<국경시장> 중


국경시장에서는 물고기비늘이 값을 치를 수 있는 돈이다. 물고기비늘을 사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억 일부를 팔아야만 한다. 소설에 나오는 이들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시절의 기억부터 인생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의 기억을 팔아치운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시장에서 점점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아진다. 그럴 때마다 기억을 팔아 물건을 산다.

보름달의 밝기가 절정에 달하자 국경시장의 골목도 늘어났다. 세 개에서 여섯 개로, 여섯 개에서 열두 개로.

밤이 깊을수록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들의 흥겨운 거래는 더해갔다.


'나'만 국경시장에서 사고 싶은 물건이 없었기에 기억을 하나도 팔지 않았다. 주코와 로나가 기억을 판 값으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며 낭비를 하는 사이, '나'는 혼자 인파 속을 걷다가 원하는 물건을 발견하게 된다.


가면을 파는 가게에서 어린 시절에 최초로 만든 종이가면과 흡사한 -소년잡지의 별책부록으로 딸려온, 당시 유행하던 로봇 머리 부분이 굵은 펜션으로 그려진-가면이었다. '나'는 그 종이가면을 꼭 손에 넣고 싶어서 처음으로 기억을 팔게 된다.


인생에서 좋았던 순간이라고는 아버지와 떨어져 살던 시절밖에 없으므로 유년을 팔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해외 파견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의 기억 일부를 팔기로 마음먹었다.

-<국경시장> 중


한번 팔기 시작하자 그 이후로는 멈출 수 없었다. 국경시장에서 '나'는 원하는 것이 많아졌다. 그래서 몇 년치의 기억을 팔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기억을 팔아버렸다.

보름달이 지면 한순간에 사라질 국경시장의 부질없는 것들을 위해.


국경시장은 보름달이 뜰 때만 열리는 시장이다.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길을 잃은 자들, 오랜 여행으로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자들에게만 보이는 곳이다. 그곳은 보름달이 환하게 떠오를수록 더 많은 물건이 나타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판다. 기억이 사라질 때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손에 넣은 것들은 보름달이 지고 국경시장이 문을 닫으면 하자도 남지 않는다.

한순간 빛나는 것들을 위해 기억을 파는 사람들.


주코는 유년의 기억부터 시작해서 모든 기억을 팔았고, 로나는 자살을 시도했던 순간의 기억부터 시작해서 모든 기억을 다 팔았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기억부터 시작해 어딘지 모를 기억까지 팔았다.


만약 기억을 팔아서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다면 어떤 기억을 가장 먼저 팔 것인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유년기의 기억? 슬프고 아프고 분하고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기억?

<국경시장>에서 기억은 팔면 사라져버린다.

아무리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도 막상 사라져버린다면 내 생을 구성하고 있는 일부는 빠져있는 것이아닐까. 기억해서 좋을 것 하나 없는 기억이라도 하더라도 삭제버튼을 누르듯 잃어버린다면 몹시 고통스러울 것 같다. 기억하지 못하면 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으니까.


소설 속 '나'는 기억을 팔아 많은 기억을 잃었지만, 남아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 기록을 시작한다. 기억나는 부분을 겨우 붙여가며 국경시장에서 있었던 일을 쓴다. 다만 너무 많은 기억이 사라져서 '나'는 다른 모든 기억을 잃은 채 오직 하룻밤 있었던 국경시장만을 떠올릴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면 당신은 기억을 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기억이 무게를 재는 손바닥 위에 오를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한번 팔아버린 기억은 즉시 사라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가 날마다 취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