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날마다 취하는 이유

김중혁 <가짜 팔로 하는 포옹>

by 페이지

날마다 술을 마시고 취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한두잔으로 시작했다가 한두병으로도 끝나지 않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지만 모두 한가지 이유로 술을 끊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 책에 나오는 규호와 피죤은 말 그대로 날마다 술에 취해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왜 하루도 빠짐없이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걸까. 어떤 이유로든, 그들이 손을 내밀었을 때 잡아줄 따뜻한 손이 있었으면 좋겠다.




알지. 내가 다 죄인이지. 전부 내 잘못이지. 그런데 그거 알아?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나는 그때 네가 날 안아주길 바랐는데, 네 등만 봤다고. 등에는 가시만 잔뜩 돋아 있었고.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


도로변에 위치한 아파트도 아주 늦은 밤이 되면 주위가 고요해진다.

사차선 도로를 채우던 차들이 사라지고 버스정류장에 모여있던 사람들도 사라지고 종일 바닥을 쪼아대던 비둘기도 사라진다. 천장에서 들려오는 위층의 발소리도 사라진 그 시간, 가끔 굉음을 울리며 달려가는 폭주족 오토바이를 제외하면 아무 소리도 없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은 밤, 잠마저 사라져 버릴 때가 있다. 따뜻한 이불을 덮고 눈을 감고 양을 세어봐도 아무 소용이 없다. 잠은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다. 갑자기 양이 울타리를 넘어 셀 수 없을 만큼 한꺼번에 넘어와 돌아오지 않는 잠을 더 멀리 쫓아버릴 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앉는다. 다시 누워봐도 잠은 찾아오지 않을 곳으로 사라졌다는 걸 알기 때문에 눕지 않는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조금씩 흔들린다. 그 아래로 가끔 고양이가 지나간다. 텔레비전을 켜자 한밤의 먹방이 펼쳐지고 있다.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캔맥주를 마시면서 그런 것들을 지켜는 밤이 있다.

잠이 사라진 시간 위로 가로등, 고양이, 화면만 켜진 텔레비전, 누군가에게 들었던 날카로운 말, 무릎에 박혀서 흉터로 남은 돌가루, 그리고 캔맥주 같은 것들이 소리 없이 쌓여간다.


편의점에 가면 윈저 12년 산이 가장 쌉니다. 아마 2만 원 조금 넘을 겁니다. 하루에 한 병씩 마시기엔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만, 어중간한 맥주를 마시고 취하지 않는 것보단 낫습니다. 전 이상하게 소주를 마셔도 잘 취하지 않습니다. 맥주나 소주를 마시면 계속 마시게 되니까 어느 순간부터 윈저를 마시게 됐습니다. 윈저 12년 산을 마실 때도 있고, 임페리얼을 마실 때도 있습니다. 몇 년 산이든 하루에 한 병, 더 이상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죠. 한 병을 다 마시면 쓰러져서 잠들었으니까요. 물은 타지 않았고, 커다란 물 잔에 마셨습니다. 물을 타거나 작은 잔에 마시면 향수 냄새가 잘 나지 않습니다. 뚜껑을 돌릴 때가 참 지랄 같습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의 봉인이 해제될 때, 이제 이 술을 환불할 수는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 그때가 제일 괴롭습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


날마다 윈저 12년 산을 마시고 취하는 사람은 피죤이다. 피죤은 편의점에 가서 가장 싼 위스키를 산다. 가장 싸다고 해도 2만 원이 넘으니 하루도 쉬지 않고 마시면 상당한 금액이다. 그럼에도 피죤은 취하기 위해 위스키를 마신다. 소주나 맥주로 취할 수 없어니 취할 수 있는 술을 선택하는 것이다.


규호는 정윤에게 피죤의 말을 피죤의 목소리로 전하고 있다.

피죤은 규호와 알코올 중독 모임에서 만난 사이, 정윤은 규호가 예전에 사귀었던 전 여자 친구이다.

정윤은 날마다 술에 취해 알코올 중독까지 가버린 규호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헤어졌는데, 규호가 할 말이 있으니 나와달라고 했고, 정윤은 규호 앞에 이렇게 앉아있다.

몇 년 만에 만난 규호는 예전과 변함없이 술에 취해간다. 취할수록 규호는 별것도 아닌 소리에 민감하고 욕을 하고 화를 낸다. 정윤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때를 기다린다. 덜 취하면 규호는 자신에게 매달릴 것이고, 완전히 취하면 규호의 모든 뒤처리를 해야하기 때문에 시간을 재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옛 연인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규호는 다시 맥주를 시켰다. 새로운 맥주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규호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소변기 앞에 서서 규호는 피존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보았다. 이야기 대부분이 좀 전에 들은 것처럼 생생했다. 이야기하면서 피존이 흥분하던 모습도 눈앞에 그려졌다. 규호는 정윤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기분이 술기운 때문인지, 오랜만에 만난 정윤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술을 마시기 전의 참담한 기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낮 동안 우울했던 마음이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규호 앞에는 새로운 맥주잔이 도착해 있었다. 규호는 헛기침을 몇 번 해서 이야기가 곧 시작될 거라는 걸 정윤에게 알렸다. 정윤은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기다렸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


술을 마실 때, 꼭 취할 때까지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취할 때까지 마셨던 때가 있었다. 한번 마시면 끝까지 마시고 싶었고 숙취가 남아있는 상태에서도 저녁이 되면 다시 마시고 싶어졌다. 잠을 못 자는 날들이었는데 술을 마시면 잠이 잘 왔다. 그럼 잠을 자고 싶어서 술을 마셨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술을 마시는 첫 모금을 입에 머금고 있으면 입안이 마비되는 느낌이 좋았고 그런 식으로 마시다 보면 어느새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좋아서 계속 마셨다. 그때는 주변에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렇게 마셔도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조차 술을 찾는 나를 깨닫게 되면서부터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술을 마시면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만 드니 안 마시게 된다.


오랜만에 정윤을 만난 규호는 계속해서 술을 마신다. 그러면서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피죤의 이야기를 계속 한다.

피존은 매일 저녁 6시에 혼자 사는 원룸에서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한다. '이미 지나간' 전날 뉴스를 다운받아서 보며 술을 다 마시는데 걸리는 시간은 45분이다. '이미 지나간' 세상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그는 전날 뉴스가 끝나는 시간에 술에 취해 잠든다.

어느날 원룸 복도 끝에서 살려달라는 여자 목소리를 들려온다. 윈저 12년 산 병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을 때였다.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피죤은 술에 취해 잠들어버렸다. 하지만 살려달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계속 들려왔기에 새벽 3시에 잠에서 깼다. 피존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짐작되는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피죤은 cctv 확인을 하지 못했고 다시는 복도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원룸에서 혼자, 탁자에 엎어져서. 탁자에는 위스키 두 병과 완성된 에펠탑 모양의 지그소 퍼즐이 놓여있었다.


규효의 입에서 피존의 죽음을 듣고 정윤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규호가 완전히 취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한 번만 안아달라는 규호의 부탁에 정윤은 계산서만 들고 일어선다.

정윤이 떠난 뒤 규호는 생맥주와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해서 소주 두 잔 정도의 양을 생맥주에 부었다. 그리고 정윤이 떠난 자리에 소주잔을 놓았다.


규호는 혼자 술을 마실 때면 늘 그러곤 했다. 거기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러곤 했다. 거기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러곤 했다. 규호는 소주를 탄 생맥주를 마셨다. 의자의 천을 계속 보았다. 계속 보니 거기 누가 앉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서 땅콩 껍질이 허공에 날렸다. 자신의 몸도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규호는 양손으로 맥주잔을 꼭 쥐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


규호는 혼자 마시기 시작한 술을 얼마나 더 마실 것인가.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 좋아서 술을 마신다고 하면서 규호는 그런 느낌이 들면 왜 양손으로 맥주잔을 꼭 쥐는 걸까. 몸이 붕 뜨는 느낌이 좋아서 마신다는 말 속에는 가라앉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들어있는 건 아닐까.


나라고 물에 빠지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꿈을 꾸고 싶겠냐. 안아달라고, 건져 올려달라고 팔을 내미는데 팔이 뻗어지지 않는 꿈, 내가 겨우 힘들게 상대방의 팔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전부 마네킹들이야. 나를 잡아 올려주는 손들이 뚝뚝 부러지면서 나는 저 아래로 끝없이 떨어져. 그 기분은 아무도 몰라.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중


두려움 때문에 규호는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신다. 악몽 대신 다른 꿈을 꿔보라는 말은 실제 악몽을 꾸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꿈일수록 자꾸 꿈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꿈을 꾸지 않기 위해 그는 취하도록 술을 마신다. 물에 빠지는 꿈을 꾸지 않기 위해 마시는 술이 실제로는 자신을 헤어 나오지 못할 깊은 곳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규호는 마시고 또 마신다.


피존은 술을 마실 때마다 창문을 잠갔다. 자신의 몸이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작은 창문인데도 취한 자신이 뛰어내릴까 두려워서였다. 피존은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고 두려웠다. 술을 끊지 못하는 자신의 내부가 '1년이 넘도록 음식을 넣어두고 잊어버린 싱크대의 내부'처럼 느껴져서 더욱 열 수 없었다.


스스로 숨어버린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진창이 된 자신의 내부'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원룸의 탁자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가 죽은 피죤은 끝내 자신의 내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옛연인 정윤이 떠난 술집에서 여전히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규호는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내부의 문을 잠그고 악몽조차 꾸지 않기 위해 계속 술을 마시고 취하는 일상을 반복하는 사람들.

'물에 빠져 겨우 팔을 잡았는데 모두 마네킹이었다'는 규호의 말이 절규처럼 귓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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