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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Feb 12. 2020

영화 <기생충> - 햇빛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수상을 축하하며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작년 6월, 이 영화를 두 번 봤다. 한번은 혼자 조조로, 그 다음은 여럿이서 밤에.

처음 봤을 때는 슬펐고, 두 번째에는 디테일에 놀랐다.

그때 블로그에 썼던 영화리뷰를 이곳에 다시 옮겨본다.

봉준호 감독의 수상을 축하하며. ('다 계획이 있었구나'라는 기택의 대사처럼, 촘촘하면서 재치있는 짜임새가 돋보였던 감독의 수상소감까지도 너무 멋졌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


창은 반지하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다.

길가에 접해있어 세상의 소음과 풍경이 여과없이 전해지는 창.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오가는 소음과 매연, 취객의 추태를 고스란히 볼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지만 창은 가족에게 소중하다. 반지하에서 하루 중 절반의 해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니까.

창가에 걸린 낡은 양말들이 지상에서 내려오는 햇빛을 받고 있다.
기택 가족이 겪고 있는 삶의 질감을 드러내는 듯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는 양말의 표면은 거칠어 보인다. 그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양말 너머로 세상이 보인다.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세상의 절반, 그러니까 사람들이 오가는 다리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다 보인다.

다만 가족은 늘 세상을 올려다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지하의 절반에 속하는 공간, 즉 벽 밖에 볼 수 없다.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방과 거실과 부엌의 구분이 모호한 그곳에서 가장 묘한 느낌을 주었던 공간은 바로 화장실이다.
보일러와 고무통과 세숫대야와 샤워기가 한데 섞여있는 욕실 한쪽 구석 계단에 자리잡은 변기. 물때와 곰팡이가 가득 끼고 변기를 비롯해 균형이 맞지 않은 욕실은 그 자체로도 가난의 냄새를 넘어서서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

삶의 어떤 조건보다도 생존과 직접 관련된 (먹고싸는) (그리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와이파이)문제가 가장 시급한 일이었기 때문에 감독이 변기의 위치를 높게 설정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인구 천만이 넘는 큰 도시 서울에는 우리가 생각해본 적 없는 형태의 집들이 꽤 많다.
특히 반지하나 지하에 있는 집들은 더욱 그렇다.
공간을 쪼깨고 쪼개어 많은 방을 만들어야 집주인은 그만큼 많은 월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구조도 나오는 것이다. 아예 화장실이 없거나(심지어 공동화장실도 없다) 수도꼭지만 하나 있는(그마저도 없는) 방도 존재한다.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아들 기우(최우식)가 친구 민혁(박서준)의 소개로 부잣집의 고액과외를 하게 되면서 기택 가족은 부유층으로 첫 진입을 시작한다. 기우는 반지하에서 계단을 오르고 또 계단을 오르고 하염없이 이어지는 비탈길을 오른다.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전부터 상류층과 하류층을 표현하기 위해 계단이나 비탈을 많이 사용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곳이 부암동이라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기우는 정말 오르고 또 올라 부잣집에 도착한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내부를 볼 수 없는 고압적인 형태의 집이다.

사진출처 : 네이버영화


누군가 열어준 대문으로 들어가 또다시 계단을 올라 마당에 발을 내딛는 순간 기우의 표정.
넓고 푸른 잔디와 잘 가꾸어진 나무, 정원 가운데 있는 스프링쿨러. 기우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생전 처음 보는 놀라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사진출처 : 네이버영화


기우가 대문을 들어선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순조롭다.

까다로워 보이던 처음 말투와는 달리 순진하고 단순한 사모님 연교(조여정)는 기우를 신뢰한다. 사모님의 그런 성격을 파악한 기우는 연교의 아들 다송(정현준)의 미술선생님으로 자신의 동생 기정(박소담)을 추천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성공한 가족사기단 느낌을 주며 술술 풀려간다. 물론 기택 가족의 입장에서 '술술'이겠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응원하게 된다. 기정은 아버지 기택(송강호)를 박사장(이선균)의 운전기사로 소개하고, 기택은 아내 충숙(장혜진)을 가사도우미로 소개한다. 이리하여 기택 가족은 부잣집에 달라붙어 살게 된다.

상류층의 맛을 본 기택 가족은 들떠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연습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어찌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있을까.
늘 변수는 존재하고 그런 변수에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고통 받은 이들은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산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기택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그는 아들 기우에게 이런 말을 한다. "무계획이 계획이다." 고.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짧았으니

박사장네 가족이 캠핑을 떠나던 날, 기택 가족은 부잣집 거실에 둘러앉아 파티를 한다.
거실에서는 큰 창을 통해 푸른 잔디가 깔린 마당이 보인다.
보고 싶지 않은데도 어쩔 수 없이 봐야 했던 노상방뇨하는 취객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평온하고 여유로운 풍경은 기택 가족만의 것이었다.

낮에 기우는 잔디에 누워 하늘을 본다. 왜 그곳에 누워있냐는 질문에 기우는 '여기 누워있으면 집 천장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좋다.' 고 한다. 기택과 충숙은 즐거워하고 기정은 욕조에서 거품목욕을 즐긴다.
저녁이 되자 그들은 비싼 양주와 안주들을 테이블 가득 차려놓고 신나게 마신다. 주인이 떠난 집에서 그들은 주인처럼 마음껏 떠들고 취한다. 박사장 가족을 속인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 "부자들인데 참 잘 착해."라는 기택의 말에 충숙은 "부자니까 착한 거야. 내가 부자면 나는 더 착해."라고 한다.

해가 저물면서 시작된 비는 밤이 되면서 더욱 거세진다. 심지어 천둥 번개까지 친다. 그럼에도 가족은 자신들에게 닥친 행운을 기뻐하며 밤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때 억울하게 쫓겨난 문광(이정은)이 벨을 누른다.

이때부터 영화는 다른 장르로 전환한다.

인터폰에 비친 문광의 모습은 기괴하다.
비에 젖고 얼굴은 멍들고 퉁퉁 부은..

문광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문광은 두고 온 것이 있다며 식품저장실로 내려간다. 와인이나 매실청을 비롯해 식료품을 보관하는 저장실.
그곳 벽장 뒤에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박사장 가족도 모르는 비밀의 문을 문광은 알고 있었다. 박사장 가족이 이사오기 전부터 이 집의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었으니까.

비밀 문 뒤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지하.
말 그대로 땅 밑에 위치한 그곳은 당연하게도 어두웠고 지하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4년째 한 사람이 살고 있다. 대만카스테라 장사를 하다 계란파동 때문에 사업이 망하고 사채 빚까지 떠안게 된 문광의 남편이 사채업자들을 피해 지하에 숨어있었던 것.
문광의 남편은 박사장 가족이 없을 때는 문광과 함께 집주인처럼 마당과 거실과 햇빛과 집을 누렸다.


반지하생활자와 지하생활자

기택 가족과 문광 가족은 모두 박사장 가족에게 기생하고 있는 셈이다.
차이가 있다면, 기택 가족은 반지하의 습성을 가지고 있고 문광의 남편은 지하의 습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반지하에서는 올려보아야 하지만 세상을 볼 수 있다. 하루의 절반이지만 햇빛이 들어오고, 자신의 위치와 반지하에 위협을 주는 대상을 알고 있으며 올라가야 할 곳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지하에서는 햇빛은 물론이고 세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의 위치가 지하라는 건 알고 있지만 자신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나 장소를 파악하기 힘들다.
지하생활자인 문광의 남편은 세상을 잊은지 오래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지하가 태어난 곳처럼 편하고 익숙하다'는 말은 문광의 남편에게 더이상 아무런 의지도 없으며 자신만의 가치관도 상실한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지하에서 모스부호로 박사장에 대 ' respect'표현하는 장면은 그가 사라진 시대의 통신수단을 사용하여 일방적인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입장에서는 박사장에게 보내는 절실하고 절대적인 메시지겠지만, 박사장과 연교에게는 '고장난 센서등'정도로만 보인다. (인디언 놀이에 빠져있으며 스카우트 경험이 있는 다송은 모스부호를 알고 있지만 한글로 전환시키지 못한다.)
결국 문광의 남편이 보내는 모스 신호는 아무에게도 닿지 못하는 지하세계의 혼잣말일 뿐이다.

결코 숙주가 될 수 없는 기택 가족과 문광 부부, 그들은 살기 위해 싸운다. 생존을 위해 생명을 걸고 싸운다. 대를 향한 칼을 거두면 자신이 피를 흘린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잘못되어간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아무리 많은 계단을 올라가도 지상에서 살 수 없는 그들은, 그들만의 피 터지는 싸움을 한다.

누구의 행복을 나눠야 하는 것일까.
기생하는 자들은 행복을 나눌 수 없는가.
인디언의 아픈 역사를 놀이의 형태로 여기는 박사장으로 대변되는 계층과 지하로 내려가는 계층 간의 괴리는 극복될 수 있는가.
명확히 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다. 현실은 착한 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비가 내려도 그곳의 햇살은 빛나

지하실에 문광과 문광의 남편을 가두고 박사장네 집을 탈출한 기택, 기우, 기정. 계단을 내려오고 내려오고 지하도를 지나고 또다시 계단을 내려오고 내려온다. 집으로 돌아가면 잠시라도 편히 쉴 수 있을까 했지만, 동네는 쏟아져내린 비로 물에 잠겨 있다. 구정물을 헤치며 그들은 반지하집에 도착한다. 남루한 살림살이들이 둥둥 떠다니는 그곳은 기택 가족이 처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가슴까지 물이 차오른 집에서 그들은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들을 가져온다.
그중 기우는 민혁이 선물로 주었던 수석(재물을 가져다준다는 돌)을 품에 안는다.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아버지 기택의 말에 기우는 아마도 자신의 인생은 계획대로 살겠다는 의지로 수석을 품에 안고 있었던 것 같다.

가난한 동네는 물에 잠겼지만 부유한 동네는 비가 와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빛난다.
다음날 아침, 다송의 생일파티가 벌어지는 박사장네 마당에는 눈부신 햇살이 비치고 있다.

'비'는 어떤 이들에게는 커다란 재난이 될 수 있지만,또 다른 이들에게는 하룻밤 캠핑을 못해서 짜증나는 정도로 지나갈 수 있다.

보송보송하게 마른 잔디와 깨끗한 테이블과 접시 위로 놓인 정갈한 음식들. 직접 연주되는 클래식과 선을 넘지 않은 우아한 태도의 사람들.

"저 사람들은 갑자기 모였어도 자연스럽다. 나도 자연스럽게 잘 어울려?"
기우는 박사장의 딸 다혜에게 묻는다. 다혜의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세련되고 우아한 세계와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기우는 그 세계에 어울리는 자신을 위해 계획을 실천하려 한다. 기택이 말했던 '무계획이 계획,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가 예언이 되어버린 듯 기우는 참담하게 계획에 실패한다. 그리고 그의 실패는 막을 수 없는 비극을 불러온다.



투쟁, 냄새, 선

-투쟁
가난을 벗어던지고 상류층으로 진입하기 위한 투쟁은 실패로 끝나고 남은 것은 온몸에 짙게 밴 지하의 냄새 뿐.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었으나 혁명은 체제를 뒤흔들어야 하는 것. 기택 가족은 거짓을 통해서라도 좀더 잘 살기 위해서 투쟁을 했을 뿐이다. 그러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얽히게 되고 모든 계획은 홍수로 잠긴 반지하집처럼 그야말로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만다.

-냄새와 선
영화를 보면, '냄새'와 '선'이라는 단어가 귀에 콕 박힌다.
박사장은 '선'을 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고용한 사람이 선만 잘 지키면 해고할 이유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기택은 예의바르고 정감있고 배려 깊으며 경험많은 운전기사로 나무랄 데 없다. 하지만 박사장은 연교에게 기택의 '냄새'에 대해 언급한다. 오래된 행주에서 나는 냄새, 지하철 타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가 나서 견디기 힘들다고. 아무리 선을 지켜도 냄새를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까. 그리고 박사장은 기택이 위로한다고 건넨, '사장님도 힘드시겠어요'라는 말 한마디에 기택의 냄새가 더욱 견딜 수 없다고 여기게 된다. '감히 나를 위로해. 너 따위가!' 이런 마음이 숨어있었겠지.

박사장의 아들 다송이 기택, 충숙, 기우, 기정에게서 모두 같은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지하에 살면 옷이나 머리, 몸에 습기 찬 쾌쾌한 냄새가 난다. 아무리 겉을 포장하고 다른 사람으로 연기를 한다고 해도 오랫동안 밴 냄새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나서 명치가 답답한 이유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냄새'일 것 같다.
쉽게 바뀔 수도 없고 쉽게 씻어낼 수도 없으니.

사진출처 : 네이버영화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엔딩크래딧이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일어섰다.

햇살 쏟아지는 거리를 걸어도
한참 머릿 속에 남는 장면은
기묘한 형태로 만들어진 반지하의 화장실과 지하에서 머리로 쳐서 만들어내는 모스 부호였다.

누군가에게는 사라진 시대의 유물이자 기호 이상의 의미는 전혀 없는 모스부호가, 더이상 물러설 곳 없는 누군가에게는 어쩔 수 없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으로 그려졌기 때문.

 그것 기우가 영화 속에서 몇 번이나 언급했던 비극의 '상징적'모습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밤이 되면 빛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혼자만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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