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식당에서 옛연인과 재회했을 때 그리워지는 것들
백수린 <오직 눈 감을 때> of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너 가지 좋아하지?"
그가 말했다.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어향가지를 시키고, 그가 좋아하는 깐풍기를 시키고, 빼먹지 않고 고량주도 시켰다.
"음, 여기 진짜 맛있다."
나의 기억보다 살집이 조금 붙었고, 머리숱이 줄어든 그가 깐풍기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음식은 훌륭했는데, 특히 베어 물면 튀김옷이 바사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부드럽게 녹아내리를 어향가지는 어디에서도 먹어본 적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은 탓인지 아니면 고량주 탓이니, 그도 아니면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 탓인지 비에 젖었던 몸이 따뜻해지고 조금씩 나른해졌다.
"너 아직도 그러네."
그는 오래전 맛있는 것을 먹을 때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런 그를 보자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자연스럽게 밀려왔다. 창밖의 비는 조금도 잦아질 기미가 없이 계속 세차게 내렸고, 그 탓에 어둑어둑한 실내가 더욱 아득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음식을 입에 넣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오직 눈 감을 때> 중
옛 연인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낯설다.
살집이 불고 머리숱이 줄어든 그를 보는 '나'.
두 사람은 스물한 살에 만나 스물두 살까지 연애를 하다 헤어진 옛 연인이다. 지금은 마흔이 되었으니 거의 이십 년 만에 재회한 셈이다. 원래 '칠성 반점'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어느새 이름이 바뀌었는지 '칠성 반점'은 없고 '차 이나향'만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여름의 끝자락이었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나'는 비에 젖은 몰골로 '칠성 반점'이었던 '차 이나향'이라는 허름하지만 맛집으로 소문난 중국식당에서 그와 재회를 했고, 점심시간이 지난 식당 안에 손님은 그들 둘 밖에 없었다.
헤어졌던 옛 연인을 만나 어향가지와 깐풍기에 고량주를 먹을 수 있을까.
그것도 이십 년 전에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얼굴로 어떤 인사를 해야 할까? 어떤 장소에서 만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은데 허름한 중국집은 괜찮은 걸까.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럽지 않을까.
차라리 말을 말자. 그런데 이 지점에서 궁금해지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나'는 왜 옛 연인을 만나는 것일까?
옛 연인이었던 그와는 같은 동기였기 때문에 헤어진 뒤에도 마주친 적이 있었고 소식도 전해 들었었다. 단둘이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다른 여자와 결혼해 캐나다에서 아이 둘을 낳고 살고 있는 그는 한국에 모처럼 들어온 김에 얼굴을 한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거의 이십 년 전에 헤어진 옛 연인이 갑자기 연락을 해서 한번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순간 망설인다면 아직 옛연인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추억이 되어버린 옛사랑이 떠오른 것일까. 아니면 만날 필요가 없다는 마음이 드는 것일까.
어쩌면 나도 모르는 내 마음 어느 한구석에 이제 나도 그와 밥 한 깨 쿨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가 아직도 끈질기게 남아있는 걸까? 나는 약속 장소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자문했다. 아니면 그가 놓친 나를 조금은 아쉬워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고 싶은 욕구라든가, 내가 아주 잘 살아가고 있음을 그에게 보이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이. 하지만 손님 하나 없던 중국식당에서 그와 마주 앉는 순간, 나는 내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가 그 모든 것들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직 눈 감을 때> 중
대학 동기이자 연인이었기에 그들은 공통으로 알고 지냈던 선후배들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수록 함께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감기에 걸린 자신을 위해 한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감기약을 가져다준 그.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려주면서 시간의 아까움을 몰랐고 별것도 아닌 일로 쉽게 싸웠다가 쉽게 동지가 되었던 그들. 영원을 믿으며 모든 빈칸이 채워진 혼인신고서를 가지고 다니던 그들. 마흔이라는 나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의 그들이 떠올랐다.
비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테이블에는 삼선짬뽕과 짜장면이 더 놓였다.
그는 결혼생활과 귀여운 아이들 이야기를 지나 오랜만에 들린 고향 이야기를 했다. 고향에 내려간 첫날 저녁을 먹고 아내와 바람을 쐬려고 시내에 차를 타고 나갔는데 시내가 너무 캄캄하고 쥐 죽은 듯 조용했다는 거였다. 유령도시처럼 사람 하나 없이 어두운, 고향의 시내를 설명하면서 그는 말했다.
"너도 와봐서 알지만 그런 도시가 아니었잖아?" -<오직 눈 감을 때> 중
그 말에 '나'는 그의 고향이 떠올랐다. 다른 기억으로. 스무 살, '나'는 그를 만나러 그곳에 내려갔었고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나야. 아직도 너의 마음이 유효하면 너의 여자 친구가 되고 싶어 왔어." -<오직 눈 감을 때> 중
그때 카고 바지에 삼선 슬리퍼 차림으로 달려온 그는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지. 나는 내 인생의 모든 행운을 다 써버린 것 같아." -<오직 눈 감을 때> 중
하지만 지금 그는 이십 년 전의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다른 말만 하고 있었다. 고향의 상권이 다 죽어서 그렇게 유령도시처럼 변했다는 것. 고향에 남아있는 친구들이 거의 없다는 것. 불 꺼진 건물이 롯데리아였다고 가리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는 것. 정말 한 군데도 불빛이 없었다는 것.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의 고향과 관련된 '나'의 추억가 '나'의 과거를. 그리고 '만약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더 사랑을 받았을까?'라는 질문을 속으로 던져본다. '예전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마음에 든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없었고 별 볼 일 없었던 그 시절들이 그리워졌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나인 것을 온전히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나는 점점 더 그런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잃어버린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오직 눈 감을 때에만 내게로 잠시 돌아왔다 다시 멀어지는 모든 것들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내 것인 줄 알아차리기도 전에 상실해버린 그 모든 것들이.
-<오직 눈 감을 때> 중
칠성 반점이었던 차이나향이라는 중국식당에 앉은 옛 연인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모르고 비는 그칠 줄 모른다.
한낮인데도 어두운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 끝자락.
'나'는 식당의 이름이 무엇이든 음식 맛이 끝내주는 이 식당이 '당분간 이 자리에 계속 불을 밝힌 채 있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옛연인을 만났을 때 공통으로 나오는 이야기를 과거의 시간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두 사람의 앞에 어떤 음식이 놓였는지에 따라 조금씩 이야기의 대상이 달라질 수 있지만 과거를 공유했던 그들에게 과거는 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자 유일한 부분이니까.
옛이야기가 바닥나면 옛연인들은 자신이 속한 현재의 삶을 뜯어내어 조금씩 뿌리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살이 불고 머리숱이 적어졌을 뿐 아니라 주름이 늘고 잡티가 흉하게 자리잡은 얼굴이 보이고, 그 모든 외적 노화 사이로 결코 좁힐 수 없는 거리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마흔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보였던 그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모든 것들이 부질없이 느껴지고 슬픈 예감은 확신이 되어 자리잡으면 옛연인은 빗속을 향해 걸어나가 각자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이 소설은 백수린의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에 실린 짧은 소설이다. 이 책에는 13편의 짧은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주로 무언가를 상실했는지 모른채 평범하고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무엇을 상실했는지 짐작만 한 채 돌아보지 않는 그들의 마음에는 텅 빈 공간이 넓게 자리잡고 있다. 오래되어 단단해진 그 빈 공간을 채우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