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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May 08. 2020

인상이 참 좋으세요.

하루에 헌팅 두 번

 하루에 15분 간격으로 두 번이나 헌팅을 당한 날이 있다.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파란 하늘에 둥실 떠다니는 구름은 한가롭고 살갗을 스치는 바람은 시원하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한마디로 기분도 컨디션도 좋은 날이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데, 누군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 내 옆에 서더니 말을 걸었다.

"인상이 참 좋으세요."

설마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겠지 싶어서 말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다. 하얀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는 여자였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긴 머리를 뒤로 묶고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어디에서 만나도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을 얼굴이었는데, 유독 눈만큼은 인상적이었다. 쌍꺼풀 없는 작은 눈 속에서 빛나는 눈빛 때문이었다. 자신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사소한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빛이랄까.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않을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나는 눈이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었다. 여자가 내게 자신의 믿음을 심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은 붙박이를 한 듯 그대로인데 입술과 소리로만 웃으면서 여자가 내게 했던 두번째 말은 "얼굴에 덕이 많으세요." 였다. 그 말을 시작으로 여자는 나의 성격과 나의 조상까지 들먹였다.

신호는 왜 그렇게도 안 바뀌는 건지.

관심 없다는 말로 여자의 말을 차단해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나는 몇 발자국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따라와서 계속 나의 조상님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꾸를 하지 않는데도 여자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여자의 말을 요약하면 대충 이러했다. 당신의 조상 중에 안 좋게 가신 분이 계시니 그 분을 위해 제사를 드려야만 나의 훗날이 잘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몸이 아플 것이고 형편이 몹시 어려워질 것이다.

 다행히 신호등이 바뀌어 나는 도망치듯 횡단보도를 향해 달렸다. 여자는 쫓아오는 듯 하다가 포기하고 멈춰섰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 보니 여자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다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여자를 머릿속에서 털어내고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보고 웃으며 걸어왔다. 입술과 소리로만 웃는 얼굴.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지.


 이번에는 조금 전 여자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였다. 옷차림도 여자와 비슷하게 셔츠와 바지를 입었는데, 쟈켓까지 걸치고 있어서 더워보였다. 나는 일부러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남자의 시선을 차단했다. 그럼에도 남자는 끝내 내 근처로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남자가 내게 건넨 첫번째 말은 놀라웠다.

"인상이 참 좋으세요."

여자가 했던 말과 토시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그 뒤로 이어지는 말도 거의 똑같았다. 내가 대꾸를 하지 않아도 다른 곳을 쳐다봐도 그만하시라고 만류해도 남자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조상님 제사에 대한 설득이 여섯번째 접어들었을 때 나는 마침 도착한 초록색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할 때 보니 남자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중이었다. 날씨에 비해 두꺼운 쟈켓 때문인지 남자는 연신 땀을 닦아내며 새롭게 선택한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언젠가 그날의 헌팅에 대해 카페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만난 여자에 대해,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남자에 대해.

 내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대충 비슷한 결론을 내리며 말했다.

 "네가 너무 약해보여서 그래. 다른 사람들이 말하면 꼼짝없이 들어줄 것처럼 생겼잖아. 그 사람들이 첫번째로 하는 공통적인 말, '인상 좋다' 는 사실대로 해석하자면 '말 걸기 쉽게 생겼다'는 뜻이라고." 그러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멍하니 있으면 더 말 걸기 쉬워보이니까 멍하게 있지 말고."

 멍하니 있으면 더 쉬워보이고 그럴 수록 헌팅을 많이 당하는....그렇구나 싶었다.


 그 뒤로도 가끔 헌팅을 당한다. 그럴 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갈 길을 간다.

최근 종교에 대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소식들을 연달아 접한 뒤로 그날의 헌팅이 떠올랐다. 내게 자신들의 믿음을 심으려 했던 그들의 눈빛과 복사한 듯 똑같은 멘트와 아마도 멍하게 있었을 내 표정까지.


사람의 가장 약하고 아픈 부분을 건드리며 파고드는 믿음의 형태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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