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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Jun 03. 2020

밤의 연못엔 개구리 울음소리만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밤산책을 하다가 비를 맞았다.

근처 편의점이나 불꺼진 카페의 처마 밑에서 비긋기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산책을 계속하기로 했다. 안개처럼 부옇게 흩어지는 빗살이 연하고 부드러워서 괜찮을 것 같았다. 비에 젖은 흙냄새가 풍겼다. 가로등 아래로 언제까지나 서로 닿지 않을 점선들이 떨어져내렸다. 걸을 때마다 얇은 샌들 사이로 드러난 발등이 조금씩 더 젖었다.


 연못이 가까워지자 물비린내가 났다. 비가 내리지 않던 날에는 이렇게 진하지 않았다. 하늘이 자주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 계속되면서 연못 바닥에 가라앉아있는 모든 것들의 냄새들이 떠올랐다.

 그즈음 연못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밤에 우는 개구리는 내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소리를 멈췄다가 내가 멈춰있으면 다시 울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나 싶어 찾아봐도 개구리는 보이지 않았다.

연못에는 부레옥잠과 수련과 밥알처럼 작은 물풀들이 검푸르게 떠있을 뿐이었다. 빗살이 떨어져도 바람이 불어도 연못은 고요했다. 시간이 멈춘 듯도 했고, 그림 속 풍경처럼 갇힌 듯도 했다. 연못 앞에 서서 나도 그렇게 멈춰있었다. 개구리가 울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것 같았다.


 가끔은 개구리가 울면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년 여름, 독서모임에 참석했던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불탄 학교에 아무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학교 담장을 지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담장 가까이 귀를 대보니 개구리 울음소리더라고요. 세상에, 개구리가 아직 있었다니. 학교는 불탔는데 개구리들은 여전히 살아서 연못에서 울고 있었어요.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자리였다. 회원들은 근황을 나누는 것으로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누군가 불탄 학교에서 살아가고 있는 개구리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작년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한 초등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제법 큰 규모라서 뉴스에도 나왔다. 재활용품 수거장에서 시작된 불이 학교 건물로 옮겨붙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고 5층짜리 별관이 불에 탔다고 했다. 아이들은 이른 방학에 들어갔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학교 건물은 며칠 동안 검게 그을린 채였다.


 불탄 학교에 여전히 남아서 울고 있는 개구리라니.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막연한 상실감과 불안감이 떠올랐다. 검게 그을린 학교 검은 재로 뒤덮인 연못 그 속에서 헤엄치고 먹이를 찾아헤매는 개구리. 혹시라도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실 근황은 인사 나누기에 불과한 의식일 뿐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개구리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나는 <길 잃기 안내서>에서 멀어져갔다.

 리베카 솔닛의 단단하면서 유연한 문장과 깊고 풍부한 사유의 세계에 푹 빠져서 읽었던 책. 이상하고 가깝고 먼 곳의 '푸름'에 푹 빠져 길을 헤매였고, 책을 덮으면서도 아직 독서를 시작도 하지 못한 것 같은 절망을 느꼈는데. 언제까지나 닿지 못할 리베카 솔닛의 푸름에 닿고자 하는 열망과 그럴 수 없다는 열패감을 느끼면서도 눌려있던 심장이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는데. 책에 대해서 더 궁금했고 더 알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많이 듣고 싶었는데...어쩌다가.

  

 행복한 사랑은 하나의 이야기고, 해체되는 사랑은 서로 경쟁하며 대립하는 둘 이상의 이야기이고 해체된 사랑은 산산조각 나서 발치에 떨어진 거울과 같다. 거울 조각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비춰 보인다. 어떤 이야기는 근사했다고 말하고, 어떤 이야기는 끔찍했다고 말하고, 어떤 이야기는 만약 이랬더라면 하고 말하고, 어떤 이야기는 만약 그러지 말았더라면 하고 말한다. 이야기들은 도로 끼워 맞춰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껍질처럼, 방채처럼, 눈가리개처럼, 가끔은 지도나 나침반처럼 지녔던 이야기들의 끝이다.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중-


  각자 밑줄 긋고 싶은 구절을 낭독하는데 내 머릿속에는 개구리 울음소리 뿐이었다. 겨우 한 구절을 읽어내고 다른 사람들이 낭독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내 머릿속에서는 검은 재를 뒤집어쓴 개구리가 물기가 거의 말라버린 검은 연못에서 울고 있다가 깨진 거울에 올라앉았다가 그 속에 비친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그 다음은....그런 장면만을 반복재생했다.


고작 개구리 울음소리 때문에.

그날 독서모임이 끝난 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쳤다.


다시 밤의 연못. 개구리 울음소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곳에서 정적을 깨는 울음소리는 '바닥에 떨어진' 거울처럼 '저마다 다른 이야기'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연못을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자 개구리는 소리를 멈추었다. 어둠 속 어딘가에 숨어있을 녀석을 찾아 눈을 크게 떴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검푸르게 떠있는 물풀과 부레옥잠과 수련 뿐이었다. 내가 연못에서 멀어지자 개구리는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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