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 서클에 빠진 홀든
홀든은 세상과 싸운다. 그러나 그 싸움은 아이의 싸움이다.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판결하려 든다.
그는 세상을 비방하며 순수를 지키려 하지만 사실, 멈춘 시간을 지키려 한다.
앨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제인을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그에겐 오직 순수함을 가진 과거만이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절벽너머를 보려 하지 않고 순수함을 지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 한다.
군대개미는 시력이 좋지 않아 페로몬을 따라 움직인다. 선두 개미가 길을 잃고 원을 그리면, 뒤따르는 개미들은 그 길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같은 자리를 돌다가 결국 탈진해 죽는다.
이를 데스 서클이라 한다.
홀든의 방황 또한 그렇다. 그는 앨리의 죽음이라는 한 지점에서 길을 잃는다. 그 기억은 그에게 데스 서클을 그려 그를 좀먹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에 균열을 내는 것은 그가 가장 지키고 싶어 하는 피비이다.
홀든은 피비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집에 숨어들었을 때 그는 되려 피비에게 지켜진다. 피비의 순수함 덕에 부모님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었고, 순수함 덕에 홀든에게 진심이 전해진다.
피비는 홀든의 이야기에 반박하지 않는다. 그저 그를 있는 그대로 들어준다. 그리고 그 사랑은 홀든이 세상에 들이댔던 날 선 무엇과는 다른 것이다. 피비는 세상을 판결하지 않는다.
홀든은 순수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 했지만, 정작 자신이 파수꾼을 필요로 하는 아이였다.
피비가 회전목마를 타는 장면에서 홀든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그 깨달음의 순간이다.
피비는 혼자서도 원을 타고 돌아온다. 잡아줄 필요가 없다. 피비는 홀든과 달랐다.
페로몬만을 따라 움직이는 개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피비는 시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홀든은 처음으로 지키려는 손을 거두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는 것을 본다.
데스 서클은 외부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선두 개미가 스스로 멈추거나, 원 밖의 무언가가 그 흐름을 단절시켜야 한다. 홀든의 원을 끊은 것은 논리도, 어른의 충고도 아니었다. 지키려 했던 존재. 피비 그 자체였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완성된다. 홀든이 지키려 했던 순수함이, 결국 홀든을 구한다. 다만 그 순수함의 주인은 홀든 자신이 아니라 지켜주고자 했던 피비였다.
그렇다면 독자인 우리는 어떤가?
난 홀든에게 이입하여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사실 그래서 홀든의 부모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홀든을 잡아주지 않았는가?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는가? 그대들은 홀든을 사랑하긴 하는가?
하지만 이 생각은 나 역시도 아직은 내 판단이 답이라 생각하는 홀든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홀든의 부모님 또한 본인의 아이를 잃고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그것을 극복하는 중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홀든일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 모두 각자의 원 안에 갇혀있을지도 모른다. 원 안은 안락할 테다. 하지만 그곳엔 성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