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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게 묻다 - 5장 - 원망〔怨望〕

by 준서


어느덧 여름의 정점에서 꺾여 내려오기 시작하는 8월 말. 그래도 아직은 기운이 넘치는 여름, 그중에서도 태양은 일출부터 일몰까지, 애꿎은 아스팔트만을 덥히고 있었다.

어느덧 개학 날이 찾아왔고, 본격적으로 내가 새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새 학교는 낯설기만 했다.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어디든지 자신이 살고 있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였고, 나도 그랬다.

그렇지만 이미 문은 열렸기에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새 학교, 새 학기 그중에서도 첫날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전학을 오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모든 이목이 내게 쏠린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존재감 없이 섞인 것도 아니고, 또 섞이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보다는 훨씬 나았다.

연우와는 같은 반이 되었다. 지난번 이후로 학원에서는 내가 연우에게 다가갔다. 누군가와 대화하고, 상대방의 반응을 볼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살아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환경이 바뀌어 불안정한 시기에, 그런 긍정적인 감정은 어떤 방향으로든 내게 보탬이 되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나는 일주일 정도는 새 친구들과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연우와도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기뻤고, 같은 반인 지민이와도 그리고 연우의 친구인 민준이와도 어느 정도 친해졌다.

왜인지 내가 적응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나름의 근거는 있었기에 그리 막연하지는 않은 희망이었다.

이렇게 새 환경에 잘 적응한다면 내 거시적인 꿈인 ‘행복한 사람’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셈이었다. 비록 스트레스가 발목을 잡기는 했지만, 그 거시적인 꿈과 희망에 가까워졌다는 생각과 믿음은 나를 정말 기쁘게 했다.




막연한 희망이 막연하게 사라진다는 사실은 연우와의 꽤 길었던 대화와 기존의 내 생각 때문에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연하지 않은 희망도 막연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건 아직 알지 못했다.

…곧 그 사실을 깨닫게 될 터였다.

좋은 날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개학한 지 이주쯤이 지나자, 9월 모의고사가 나와 더불어 수만의 학생들에게 찾아왔다.

모의고사 전날, 아빠가 내 방문을 두들겼다.

“시은아. 아빠 잠깐 들어갈게?”

“네.”

이번엔 또 뭐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나는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아빠가 들어오는 이유가 모의고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불안감이 한 꺼풀 벗겨지자, 이제는 두려움과 알 수 없는 피곤함이 보였다.

“내일 모의고사잖아. 그렇지?”

“…네.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컨디션 유지하게 일찍 잘게요.”

“어떻게 공부는 좀, 잘 돼가? 몇 시간 안 남았는데 컨디션이 중요하니까 밤새우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렇죠.”

“지금 남은 게 뭐야?”

“국어만 하면 다 끝나요.”
“잘했네. 국어 풀고, 그러면 여기 전 과목 모의고사에 나올만한 거, 핵심 그런 개념, 뭔 말인지 알지? 요약본 같은 프린트지 아빠가 가져왔거든. 이거까지만 읽고 자. 한두 시간이면 충분할 거야.”

“국어까지 풀고 이거도 하면 새벽 서너 시쯤인데요…?”

“…일찍 자는 거도 중요하긴 하지만, 기초를 튼튼하게 해야지. 이것만 빨리 보고 금방 자.”

“…네.”

언제는 컨디션 관리가 중요하다더니, 아빠는 돌연 프린트 한 뭉치를 주며 이걸 다 보라고 했다. 무언가 이중적이고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의 행동에 이어, 파장처럼 내 감정도 이중적인 모습을 띄었다.

“마지막으로 동기부여 한 마디만 하자면, 성공한 인생과 좋은 인생은 청소년기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뤄지는 거라는 거만 알아둬라. 꿈은 나중에 펼쳐도 되는 거야. 꼭 네 꿈을 청소년기, 청년기에 펼칠 필요는 없어.”

“아…, 네.”

“솔직히 아빠가 생각해도 의대는 많이 늦은 것 같기는 하다. 초등학생이나, 늦어도 중학생. 이때부터 준비하고, 너무 빠른 것 같기는 해도 유치원 때부터 시작하는 그 의대 반도 있잖아. 그러니까 적당하게, 교대 정도라도 어떻게 갈 수 있게 성적을 유지하려고 노력을 하자고. 너 정도면 합리적으로, 교대는 갈 수 있잖아. 그 급 정도는 되고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은 되어야 어쨌든 성공한 인생, 좋은 인생의 시발점이 되고 조건이 맞는 것 아니겠어?”

“네….”

나는 이후에도 오 분 정도 아빠의 설교를 들었다. 솔직히 틀린 말은 거의 없었지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상황에 맞지 않아서 그랬을까, 자꾸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 뒤로는 불신과 약간의 박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왔다. 하지만, 당장은 다음날에 있을 시험을 준비해야 했기에 그런 감정은 잠시 묻어두었다.




“김시은, 성적이 이게 뭐야? 아빠가 지원을 얼마나 퍼다 주는데 그 상위 몇 퍼센트 안에 못 들고 자꾸 속을 썩이는 거야. 어?”

“….”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더라도 무조건 결과가 최선이 아니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건 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거 큰일이다. 특강도 많이 듣고, 새로 뭔가를 좀 더 해야겠다. 지금 조금 위태롭다는 생각 안 드니? 이래서 나중에 뭘 할 수 있겠어, 어?”

“….”

나는 나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성공만을 바라는 아빠가 밉기만 했다. 나는 대단한 걸 이룬 사람보다는 그저 뭘 하든, 하다못해 물을 마시더라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움은 원망으로 치환되었다. 그러나 그 원망은 마치 불타는 칼과 같아서, 쥐고 있는 동안 타인의 살을 베지 못하고 제 손만 태운다. 원망을 쥐고 있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손을 지지며 뜨거운 공기를 삼키기만 할 뿐이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슬슬 장기기억의 궤도에 올랐다. 나는 그 궤도에서 기억을 담은 구슬 하나를 뺀 후에 상영했다.

‘그림 그릴 시간에 수학 문제 하나를 더 풀어라.’

‘네가 죽어도 대치동에는 가기 싫다길래 여기서 1등급 맞고 좋은 대학교 가기로 했잖니.’

‘아빠가 열심히 키워주는데, 네가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하지 않겠어?’

‘죽어라 공부만 하면 다 돼. 진짜로 안되는 게 없어. 아빠가 그 예시잖니. 너도 된다니까.’

아빠는 늘 내게 그리 말했다.

아무래도 내 꿈 그리고 행복은 안중에도 없었나 보다.

“시은아. 이 아빠가 매일 하는 말이지만, 미술 같은 거는 나중에 네가 늙었을 때 일을 관두고 취미를 해보고 싶다, 그러면 그때 해보는 거야. 당장은 먹고 살 직업이 우선이지.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넌 공부를 해야만 하는 거고. 아무튼, 미술은 네 진로가 아니니 생각도 하지 말거라.”

“….”

“왜 대답이 없어. 아빠 말 무시하는 거 아니지?”
“아, 아녜요. 네.”

“또, 네가 생각해도 의치한은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늦었잖아. 늦어도 중학교 일 학년 때에는 시작해야 가능성이 있는데, 지금 의대 간다고 아무리 노력해 봐야 힘들 거 아니야. 어? 뭐, 아빠가 그래도 공부 관련해서는 지원 많이 해주잖아. 비싼 학원 보내주니까 꼭 열심히 공부해서, 유학이랑 의대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최소한 서연고, 서성한, 아니다. 교대라도 가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교대가 ‘-라도’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정도인가?

“네…. 노력할게요.”

“그래. 환경도 중요하지만, 의지가 첫째야. 아빠가 네가 공부를 해서 목표로 한 대학에 갈 수 있는 환경을 깔아줄 테니 넌 그저 공부만 하면 된다. 어려운 것 없잖아? 그렇지?”

“…네.”

평생의 거짓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어렵겠지. 어렵고말고.

“아빠가 거듭 강조하지만, 지금은 미술 대신 공부야. 알았지?”

“네.”

“그래. 이제 들어가서 공부해라.”

내 꿈을 위한 지난 수년간의 노력과 행복은 원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깐 행복을 대출했으니, 이제는 불행으로 갚을 때가 온 건가.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이자가 수십 배라니, 하하.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누가 뭐래도, 내 꿈은 포기할 수 없는 고결한 것이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고, 미술을 할 때에 행복했다.

하지만 의사인 아빠는 미술 대신 공부가 훨씬 나은 선택이라며, 미술 학원에 더는 보내지 않겠다고 말하는 동시에 지금이라도 자기의 선택에 따라 교대 입시를 준비하라고 했다. 마치 내 몸이 자기 것인 것처럼. 무언가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가슴 속에서 연기처럼 피어올라 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 하지 않은 것인지, 하지 못한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아이패드부터 시작해서 다른 미술 도구에 캔버스까지 아빠는 모든 걸 버렸다. 차근차근, 또 치밀하게 내 고결한 꿈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태동하고 있던 행복을 짓밟았다.

뭔가 대들고 싶었지만, 나는 어떻게 대들어야 하는지, 반대해야 하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복잡한 마음을 나는 그저 황당함으로 치부했다.

황당함이라는 느낌 다음으로는 체념이 찾아왔다.

‘그래, 내가 미술을 얼마나 잘하겠어. 아빠 말대로 공부라도 똑바로 해보자.’ 그 생각과 함께 나는 내가 착한 딸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아마도?

아빠가 내 방에서 나간 후 나는 다시 문제집을 폈고,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문제를 풀어나가는 속도는 처음에는 아주 빨랐다. 하지만 어떤 존재가 내게 족쇄를 채운 듯이, 진행 속도는 점차 느려져만 갔다. 끝내 어떤 한 문제에 이르러서는 스스로를 의심하는 멍청한 짓거리까지 벌이게 되었다.

도대체 왜 안 풀리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수학 문제조차도 풀지 못하는 나를 보니 너무 한심하기만 하고. 한심함은 곧 나에 대한 자기혐오로 바뀌었다. 이런 문제 하나도 풀지 못하는데 과연 아득한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형이상학적 질문을 자문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답은 없었다.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였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나는 답변을 전혀 내놓지 못했다. 완벽한 답은커녕 아예 질문 자체에 다가가지도 못한 것이다. 이제 자기혐오는 무력감과 자학으로 번지고 있었다.

책에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저 책이 눈물에 젖게 하고 싶지 않아서 책을 덮은 것이라고, 문제를 풀지 못해서 덮은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기괴하고도 어설픈 위로를 건넸다.

실타래는 이 순간부터 이미 꼬이고 있었다.




“누가 이런 애를 낳았을까.”

“그것밖에 못하냐. 왜 이걸 못해.”

“정말 내 딸이 맞긴 한 거냐? 엄마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참, 애가 총명하지도 않고 왜 이럴까.”

“또 문제집이랑 필기구가 아니라 붓을 붙잡고 있네. 아빠가 그건 네 길이 아니라고 누누이 말 안 했어?”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아빠 목소리였다. …뭐지.

“김시은, 어서 공부나 해!”

“뭘 친구들이랑 놀아. 너 나이 때는 무조건 공부가 일 순위야.”

“어휴.”

절대 내가 원해서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환청? 그런가.

점점 커지는 목소리와 다가오는 말은, 말에게 더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하듯이 나에게도 채찍질하는 듯했다.

제발 그 소리를 멈추어달라고 나 혹은 누군가에게 간청했지만, 폭주하는 기관차는 제때 멈추지 못하든 그것도 그런 상황이었다.

이제는 나 스스로조차 아빠가 한 말 혹은 비슷한 말을 떠올린다는 게 무언가 가슴 속에서 깊은 감정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힘들어서, 정말 누가 나를 구제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쌓여가는 우울은 눈처럼 제설제를 뿌린다고 녹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외려 녹이려 하면 할수록,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 스며들어 선명하게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가 사람 한 명 없는 운동장에 홀로 서 아득해 보이는 하늘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

스스로가 한 대답은 짙은 한숨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한나절이 지나 하늘에 검은 구름이 꼈다. 추적거리는 비가 쏟아졌고, 나는 그것을 학원의 창가에서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는 문제를 푸는 둥 마는 둥 하며 한참이나 창밖을 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 우산 안 가져왔는데.”

“그러니까. 갑자기 비가 오네.” 옆자리에 앉아있던 연우가 내 말에 대답했다.

“비 너무 많이 오면 안 될 텐데…. 혹시 너 우산 있어?”

“아, 우산? 나도 없지. 난 그냥 바로 옆 건물 스카나 가려고.”

“큰일이네.”

설마 저 비를 다 맞고 가야 하는 건가.

두 시간이 지나 마지막 학원이 끝났고, 나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서 건물 밖으로 향했다.

나도 스터디카페나 같이 갈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지만 이미 머리는 젖기 시작한 상태였다.

비를 쫄딱 맞으며 뛰어가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주차장의 아스팔트에 무릎이 제대로 긁혔다.

눈앞에 신호등 파란불을 두고서 나는 고통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집으로 가야 하니까.

상처에 송골송골 맺힌 핏방울이 빗줄기처럼 다리를 훑고 지나가는 그 순간에도 나는 까진 손을 털고 일어나 달렸다.

집에 온 후에는 상처에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였다. 곧 공부하려고 책을 펼쳤는데, 샤프가 도통 손에 잡히지 않았다. 참 운이 없는 날인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내 머릿속을 채운 건 ‘안 그래도 힘든데, 신이라는 존재는 날 괴롭히려고 작정한 건가’ 같은 생각이었다.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와중 정확히 세 번, 정확한 박자로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시은아, 공부하고 있니? 아빠가 지난번에 말한 문제집 산 거 왔다.” 그러고는 아빠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어림잡아도 10권은 족히 될 듯한 책 뭉치가 있었다.

“이거 세 개는 수학이고, 이쪽은 영어. 문법이랑 시험 대비용 따로 있다. 그리고 이건 통합사회 기출문제집이고….”

저걸 다 풀려면 아무래도 잠자는 시간을 더 줄여야 할 것 같았다.

“이, 이걸 다 풀라고요?”

“그래. 문제 있어? 네 직업은 학생이잖아.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아빠도 직장에서 아홉 시간은 일하고 오는데, 못해도 일고여덟 시간은 공부해야 하지 않겠어?”

그 공부를 학교에서도 몇 시간 동안, 학원에서도 몇 시간 동안 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속에서 썩히기로 했다.

“…, 뭐. 너도 좋은 대학 가려면 이 정도 노력은 해야 하는 거야. 열심히 공부해라. 네 나이 때 놀아서 뭐 하냐, 커서 보면 다 소용없어. 늘 공부만을 목표로 하고 살아.”

“…네.”

하하. 그저, 또 헛웃음만 나왔다.

왜 나는 지금 꿈과 행복이 아니라 기출문제의 정답을 찾아야 하는 걸까.

내 꿈과 희망, 그리고 인생을 짓밟은 원흉이 내 아빠인지. 세상인지. 아니면 나인지.

원인은 흐리멍덩하게 뒤섞여 형태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죄수가 갇힌 듯이 방에 머물며, 공부만 하던 어느 주말이었다. 세 시간 정도 계속 앉아 있으니, 엉덩이가 저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일어나, 딴생각을 시작했다.

…분명 처음에는 어떻더라도 사는 게 낫다는 마음으로 생각을 시작한 것 같았는데, 가면 갈수록 처음의 마음은 조금씩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끔은 이렇게 울고 싶어질 때가 있다.

때론 세상이 너무 아득하게 커 보여서, 놀이공원에 가서 엄마 손을 놓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아득한 느낌이 듦과 동시에 몸은 떨렸다.

안 좋은 것은 밖에 새어나가지 않게 담아두어야 할까, 아니면 담아두지 않고 밖으로 멀리 날려 보내야 하는 걸까?

열일곱의 나는 답을 내지 못했다.

이렇게 감정,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에 미숙한 내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오랜만에 따뜻한 엄마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네 미래를 보려거든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아라.

…이런, 조금 어두컴컴해 보이는 구름 떼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먹구름 잔뜩 낀 날씨가 내 미래려나, 하며 잠시 절망에 빠졌다가, 물웅덩이에서 나오며 초점을 멀고 추상적인 것이 아닌 가깝고 실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턱을 괴고 하염없이 창문을 바라보자, 창문 밖의 날씨 대신 창틀에 묶어놓은 화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은방울꽃을 보았다.

저기에 원래 은방울꽃이 있었던가?

원래 저기에 은방울꽃 화분이 있었나?

기억에 대한 의심과 함께 호기심이 생긴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설마 환시인가. 헷갈리기는 했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고 있는 내게 은방울꽃이라는 심심한 위로가 찾아와주었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 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필요 따윈 없었다. 아무래도 좋았다고.

희고 가녀린 꽃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내 마음을 보듬어주는 것 같았다. 은방울꽃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마치 내게 ‘힘들지?’라는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건네고 있는 게 맞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응.’

나도 은방울꽃처럼 어여쁜 꽃말을 가지고 생기있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줄기에 매달린 꽃이 선명하게 보였다.

별안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리내어 울 수 없는 이 상황을 한탄할 뿐이었다.

사실은 힘든데. 너무 힘든데.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게, 고립된 것만 같고 우울한데. 그 감정마저도 말할 사람이 없는 게 괴로워 죽겠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 듯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원망이라는 감정은 증폭되어 가고만 있었다.

누구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는 그 원망은,

나를 낭떠러지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아빠가 나가자,

나는 서랍에서 컴퍼스를 찾아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그 끝은 꽤 쓸만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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