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의 내가 그렇듯 소소한 우울을 느끼는 나날이 반복되고 있었다. ‘소소하다’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 우울과는 무언가 상충하는 느낌이 있지만, 소소한 우울이라는 말이 왜인지 내 귀에는 제법 나쁘지 않게 들렸다. 그래서 나는 종종 소소한 우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렇게 속으로는 소소한 우울을 품고 있어도, 가면을 쓰고 자기 배역에 충실하게 연기하는 배우처럼 겉으로는 완벽하게 내 속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속해서 충격을 받으면 끝내 자파(自破)하는 강화유리처럼, 내 마음도 조금씩 충격을 받으며 좋지 않은 징조가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원래부터 잠을 자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마저도 온전히 잠을 청할 수가 없게 되었다. 때로는 강한 충동이 들기도 했고, 이따금 환청이나, 심각하면 환시 등의 부정적인 쪽의 환각이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후환이 두려워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적어도 겉으로는 밝은 사람, 나름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많은 힘을 쓰고 있었다. 마치 가면을 쓰고 연기하듯이. 실제로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도 없어 가면을 벗으면, 그 가면을 벗은 나는 너무나도 초라하고 나약한 존재였다. 거울에 비치는 것은 화려한 인생의 주인공이 아닌, 그저 지친 하루를 끝낸 수많은 단역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침이 밝았고, 이 말은 어제를 뒤로 하고 도돌이표처럼 다시 반복되는 일상의 처음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틈틈이 풀 문제집들 그리고 교과서를 가방에 잘 챙기고, 등교 준비를 모두 마친 후에는 아무도 없는 집을 뒤로하고 학교로 나섰다.
원무에 맞는 제법 화려한 가면을 쓰고서.
주름진 붉은 커튼이 올라감과 동시에, 관객들은 환호를 질렀다. 오늘의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잠깐 공연장이 암전되었다.
원무 이전에, 가면극의 서막을 알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무대는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배우들은 저마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가면으로 자기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서는 공연에 임했다. 저기에 웃는 얼굴을 한 가면을 쓴 배우가 속에서는 웃고 있을지, 울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관객석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는 저 울상을 짓는 표정의 가면을 쓴 배우, 저 배우도 속에서는 웃고 있을 수도 있었다.
동상이몽, 같은 모습을 하고, 저마다 다른 꿈과 생각을 끌어안고 한데 모여 어울린다. 어떤 이에게 누구는 마음에 들고, 누구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늘 우스꽝스럽게 웃고 있는 가면을 쓰고 있다.
가면극에는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역겨운 표정을 짓고 있어도, 상대방은 그 표정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진짜 마음은 자기 얼굴과 가슴 속에 파묻고서는 가식적이고 또 위선적으로 남을 대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게 가면극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가면을 벗지 않는 한, 아니면 가면이 벗겨지지 않는 한 그 이면은 공개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배우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기본적인 규칙이며 법칙이다.
하지만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티끌만큼의 예외는 존재한다. 소품 옆에 있는 저 배우의 가면이 아무런 이유 없이 정말 갑자기 벗겨졌고, 주위의 사람들은 배우의 썩은 듯한 얼굴을 보고서는 흠칫 놀랐다. 하늘색 가면을 쓴 이는 손부채를 부치며 애써 태연한 척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하였지만, 그 배우를 보고서 하늘색 가면을 쓴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가면을 벗겨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가면을 쓴 사람들은 그 가면이 벗겨진 배우를 보고서는 배꼽을 잡고 깔깔 웃거나, 피하거나,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이 연극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 암담하다는 생각과 함께 막이 천천히 내려갔다. 이제 원무의 시작이었다. 왈츠곡과 함께 나는 H 열 1405번 좌석에서 일어나 무대로 올라갔다. …H 열에, 1405번 좌석? 그게 정말 있을까? 그 개념에 대한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있었으나, 그것이 정말 존재하는 개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직 삶과 희망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었다.
어느덧 하루가 지나,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놀이터의 그네가 보였다. 그네는 두 자리가 있었고, 각각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왜인지 그네를 타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들어, 나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가방을 그네의 뼈대인 철 구조물 옆에 두고서는 반쯤 걸터앉아 천천히 몸을 앞뒤로 흔들며 그네를 타는데, 어느 위치에서 그 시선으로 보면 도시의 불빛과 크게 뜬 저 달빛이 간간이 겹쳐 보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반동으로 그네가 뒤로 갈 때는 보지 못하였다. 또다시 그네가 앞으로 향할 때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끝없는 학원가만이 보였다. 저곳을 연우는 회색 지대라고 불렀다. 단순히 회색 건물들이 줄지어 있기에 회색 지대라고 했다.
오후 10시가 넘어 법적으로는 학원이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이었지만, 몇몇 곳에서는 간판과 함께 불이 환히 켜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네가 느려지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네의 고도가 가장 낮은 시점마다 땅을 한 번씩 차며 어떻게든 그네가 멈추게 놔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핸드폰을 켜니 학원 숙제 안내 메시지가 와있었다. 그네의 최고 고도에서, 손만 뻗으면 저 달도 딸 수 있을 것처럼만 보이는 높이에서 나는 돌연 핸드폰을 약간 푹신한 땅바닥에 때려눕혔다. 말 그대로 처박았다. 무언가 강한 충동이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날붙이만 있다면 그대로 몸 어딘가에 가져다 대고 쓱 그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필통에는 가위나 칼 따위의 도구는 없었다. 커터칼은 학교 사물함에 있었고, 가위는 책상 밑의 물건을 넣어놓는 그 공간에 두었다. 물론 그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쉬이 날붙이로 몸을 긋거나 찌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 특히 인간의 본능에 거스르는 것을 직접 하는 일이니까.
건조한 듯하면서도 무언가 더 있는 것 같아 아리송한 느낌을 주는 밤공기는 내 눈을 따가울 정도로 간지럽혔다. 절대로 내 처지가 암담하고 슬퍼서 운 건 아니었다.
눈이 부은 것 같아 세수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놀이터 옆에 위치한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에 물을 몇 번 적셨다.
그리고 곧 화장실을 나와 가방을 챙기러 그네 쪽으로 가던 중,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나연우, 연우야?”
“어? 김시은이다. 웬일로 여기에?”
“나는 방금 화장실에서 나왔지. 너는?”
“나는 그냥 집 가던 길에 그네 한번 타고 싶어서. …어, 근데 너 눈은 왜 그러냐.”
“어? 아 눈에 미세먼지인지 모래인지 좀 들어가서. 공기가 별로 안 좋은 거 같아.”
“흠. 그래? …너도 상황은 안 좋은가 보네.”
나는 가방을 챙기는 대신에, 다시 그네에 앉기로 했다. 연우는 빨간색 그네에 타고 있었고, 나는 초록색 그네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꽃이 진지 한참이나 지난 개나리 가지는 놀이터 오른쪽 담장 사이로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저 가지는 가지치기 동안 잘리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생명력이 강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도 살기 위해 저리 노력하는데, 나는 식물보다 노력해도 저 끝에 있는 비실비실한 가지로 끝날 것 같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 주위도 내 느낌에 일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공허한 느낌이 망치로 내 머리를 때리는 것만 같았다.
“여기 계속 앉아서 얘기나 할래?” 연우가 물었고,
“…좋아.” 나는 답했다.
30분, 아니 어쩌면 1시간이 지났을지도 모르겠다.
약간 늦은 밤의 어스레한 색감의 하늘은 가시고 빈자리를 완벽한 밤이 서서히 채워갔다.
“그러니까,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돼서 지치는 것도 있고, 또 너는 미술이 꿈이고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건데 너희 아버님은 공부랑 성공을 최우선 목적으로 하라고 하셔서 갈등이 있다는 거야?”
“응….”
“뭔가, 마음고생 오래 했겠네.”
연우의 그 한마디에 무언가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남한테 내가 괴롭다는 것,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인정받아서 무엇하겠냐마는, 시간이 지나니 적어도 받지 않는 것보다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뭐야, 왜 울어?”
눈물샘이 또 자극받았다는 핑계로 난 연우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바보야, 내가 아까 공기가 탁하다고 했잖아. 먼지가 눈에 좀 들어갔나 보지.”
“음…. 야, 있잖아. 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말인데 한 마디 해줄까?”
“뭔데.”
“어쩌면 인생은 돌고 도는 원무잖아. 계속 지루하게 돌고 돌아서, 가끔은 변주를 넣어줘야 해.”
“뭐야 나연우, 왜 갑자기 감성 잡고 지랄이야…. 딱 봐도 지가 방금 지어낸 말이네.”
“에이 뭐, 싫으면 됐고.”
“아냐. 더 말이나 해봐.”
“그냥, 뭐랄까.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그러면 좀 지치잖아. 가끔은 좀 다른 걸 해보면 어떨까 해서.”
“아빠가 뭐 하루 종일 공부만 하래.”
“내가 아버님 설득 시켜줄까?”
“하, 지가 뭐라고…. 야, 벌써 열두 시 다 되어간다. 너 집 안가?”
“너 먼저 가. 난 좀 이따가 갈게.”
“왜?”
“그러면 우리 둘이 같이 가게?”
“…. 내일 보자.”
나는 그렇게 양어깨에 가방을 둘러메고서는 연우를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대화를 나눌 때 연우가 한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니, 자기도 별로 상황이 좋지는 않은 것 같던데. 아니, 나보다 나쁠 수도 있었다. 약간의 동병상련이라고도 할 수 있는 느낌과 함께 어쩌면 연우도 나처럼 가면을 쓰고 원무를 추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연우의 말을 곱씹었다.
‘어쩌면 인생은 돌고 도는 원무야. 계속 지루하게 돌고 돌아서, 가끔은 변주를 넣어줘야 해.’
글쎄, 누군가가 내 원무의 변주가 될 수도 있을까?
아마도 그 대답은 ‘예’일 것이다. 아마도.
9월을 훌쩍 떠나보내니 오는 것은 당연하게도 10월이었다. 3분기를 마치고, 1년의 1/4만을 남긴 시점이었다.
무언가 작은 추억이라도 만들고 싶어서, 지민이와 연우, 정민준과 함께 주말에 놀 계획을 세웠다. 아빠가 반대하겠지만, 낙관적인 기분 때문에 그것에 대한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마침, 이번 주말에 한강 공원에서 불꽃 축제가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매년 열린다고 하는데, 왜 전에는 이런 걸 본 기억이 없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대답은 아주 긍정적이었다. 인파가 다소 몰린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하루인데 사람 사이에 끼어있을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팽배하게 깔려있었다. 나처럼 각자 저마다의 곤란한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다들 어찌저찌 무마하고는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약속을 잡은 당일은 다가오고, 일종의 거품인 낙관적인 생각이 사그라든 후에 내 눈앞에 보이는 건 불안감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갈 수가 있을까, 오래 생각해 보았다.
새벽으로 넘어갈 즈음의 늦은 밤, 나는 아빠에게 갔다. 두렵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친구들과의 약속도 깨는 게 되고, 오랫동안 후회할 것 같았다.
“…아빠.”
“우리 딸, 왜?” 침대는 아빠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고, 아빠의 볼은 불그스름했다.
“저 이번 주 토요일 딱 하루만 놀면 안 돼요?”
“학원은 어쩌고?”
“월요일에 꼭 보강 갈게요.”
“…음, 무슨 일인데 갑자기 놀려고?”
“한강에서 불꽃 축제를 토요일에 한다는데 뭔가 친구들이랑 가보고 싶어서. …요즘 공부하면서 머리도 잘 안 돌아가는데 한번 환기하는 셈 치고 갔다 오면 안 돼요? 갔다 와서도 진짜 전처럼 열심히 할게요.” 나는 허락을 구걸하듯이 아빠에게 애원했다. 이 정도는 해야 아빠가 허락을 해줄 것 같았다. 아빠는 약간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뗐다.
“…그래, 하루니까. 대신 학업엔 절대로 지장이 가지 않도록 하기로 약속해. 이런 게 선례가 되면 나중엔 주말마다 공부는 안 하고 놀 수도 있지 않겠어?”
“네, 진짜 약속할게요.”
“그래.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아라.”
“네.”
아빠가 오늘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회식을 하고 늦게 들어와 술 때문에 허락을 조금 더 쉽게 내어준 걸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허락은 허락이고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친구들과 미리 약속해 놓았는데 나만 못 가면 어떡하지’하고 고민했는데, 그럴 일은 없어 참 다행이었다. 나는 낙관적으로, 내 마음속의 고배율 망원경을 사용해 저 멀리 있는 희망을 관찰할 수 있었다. 언젠간 저 희망에 닿을 수 있겠지, 하는 무언가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느릿느릿한 3/4 박자의 원무는, 기대하는 일이 생기니 제 멋대로 빠르기를 바꾸어 빠르게 지나갔다. 가면을 쓰고 있든지, 벗고 있든지 상관없이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금요일 밤, 받은 숙제를 다 끝낸 나는 기쁨과 기대를 감출 수 없었다. 꽤 오랜만에 먼 곳으로 제대로 놀러 가는 날이라는 사실이 그 심장의 두근거림에 한몫했다.
곧 이튿날 아침이 찾아왔다. 나는 해가 막 뜨기 전의 어슴푸레한 하늘을 보고서는 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여러 준비를 끝내고 나서, 나는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연우가 서 있었다. 연우가 내게 손을 흔들었고, 나도 똑같이 인사했다. 지민이는 10분 안에 온다고 했고, 민준이는 거의 다 도착했다고 연우가 내게 알려주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그날이 온 것이었다. 하루 동안의 화려한 원무의 변주가 막을 열었다.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표정에 다 드러내고 있었다. 그 정도 세기의 감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그 긴 한강 공원에 도착했다. 꽤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돗자리를 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돗자리는 준비성이 철저한 지민이가 맡아서 가져왔다. 우리는 강변보다는 도로변에 조금 더 가까운, 개나리 가지가 일렬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펼쳐져 있는 풀밭과 인도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10월인데도 날씨는 후텁지근했다. 가을이 인수인계를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개나리 가지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자리 잡았다. 비록 노란 꽃은 한참 전에 떨어져 별 볼 일 없는 나무에 불과했지만, 무의식은 나를 그 옆으로 끌고 갔다. 나는 개나리꽃이 만개한 풍경을 상상했다. 내년 봄에 다 같이 와도 좋을 것 같았다.
지민이는 내 왼쪽 끝에, 민준이는 강변에 가까운 오른쪽 끄트머리에 앉았고, 연우는 내 옆에 앉았다. 왜인지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의 나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수시로 앞머리를 계속 만진다거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등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제는 대강 어떤 감정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확실하지 않은 감정이라며 그것을 애써 회피했다. 하지만 봄이 되면 알맞게 피어나는 개나리꽃처럼, 내 감정도 회피하기 어렵게 커지고 있었다. 곧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터였다. 그게 1분 후가 될지, 한 시간 혹은 내일, 며칠이나 몇 달 후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넷이 함께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머리를 매만지는 것을 본 연우가 내게 말을 걸었다.
“김시은, 너는 왜 이리 오늘따라 머리를 많이 만져?”
“응, 아? 뭐, 좀 흐트러진 거 같아서?”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테지’ 했으나 거울을 보니 귀는 벌게져 있었다. 그 불분명하지만, 누구에게 향하는지는 분명한 감정의 태동과 동시에 왜인지 내 마음은 낙관과 희망, 그리고 행복으로 가득 찼다. 이 느낌을 단 세글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경험이 많은 지민이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을 먹고 한참을 놀다가 오후 6시가 넘어 해가 지고, 한 시간 후에는 개막식이 진행되었다. 불꽃은 조그마한 불꽃 몇 개 말고는 본 적이 없는지라, 아직 그것을 보려면 시간이 꽤 남았음에도 심장은 두근거렸다. 아니면 그것 때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만은, 확실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불꽃이 하나둘씩 터지기 시작했다. 다들 말없이 고개를 들어 저편에서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잠깐 내려 오른쪽을 볼 때면, 나는 참을 수 없는 입꼬리의 가벼움을 견디느라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찰나에 터지고 사그라드는 불꽃이, 왜인지 희망과 비슷한 것 같았다. 아무런 연관된 점이 없었음에도 나는 직감으로 그렇게 단정 지었다.
이 원무에서, 조금씩 변주를 넣어야 더 행복한 공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은 돌고 도는 원무,
발끝을 맞추어 돌다가
언젠가 멈추는 순간에도
또 다른 춤이 시작된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 변주 속에서
찰나와 같은 희망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