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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게 묻다 - 7장 : 영원〔永遠〕

by 준서

영원, 永遠

명사

어떤 상태가 끝없이 이어짐. 또는, 시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일.

“~의 진리”

2. [ 철학 ]

보편적인 진리처럼 그 의미나 타당성이 무시간적(無時間的)인 것. 또는, 신(神)이나 진실성처럼 초(超)시간적으로 존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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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은 사전에서나 존재하는 것일 뿐. 모든 것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시간, 물, 기억까지 전부 다.




또다시 시간은 흐른다.

민준이와 지민이, 시은이와 함께 불꽃 축제를 보고 온 지도 며칠이 지났다. 잠깐은 행복했지만, 집에 돌아오니 따뜻한 곳에서 낮잠을 잤다가 깬 것처럼 그간의 감정은 가시고, 허무 그리고 공허만이 대기를 내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점점 피폐해지고 있었다.

엄마는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 ‘불확실한 길을 걷지 말고 남들 다 하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이라는 안정적인 길로 가라’고. 입학하는 사람 수만 따져보면 전국의 대학 정원의 10% 내외가 인서울 대학교라고 하던데, 내가 대강 그 안에 들어 안정적인 길로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수십 시간 동안 생각한 끝에 영 시원하지는 않은 답을 내놓았다. 내가 봤을 때 가치 있는 사람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마와 아빠의 생각과는 충돌했다.

어릴 적 꿈을 찾으려는 시도는 숱하게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대신에 공부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그 꿈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참 애석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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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중간고사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우리 가족 셋이 모두 모여 식사를 했다.

“이제 시험 일주일도 안 남았지?”

“…네.”

아침마다, 밤마다, 심지어 아빠한테는 전화로도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밥상에서도 그런 소리를 들으려니 슬슬 무언가가 치밀어올랐다.

이제 내 정신과 생각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학년 초만 해도 주위 풍경을 보며 제법 그럴싸한 말들을 지어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볼 여유조차 없었다. 이대로 가면 감정을 하나씩 떼어내고, 끝에는 그나마도 온전치 못한 이성 그 하나만을 가진 쓸쓸하면서 외로운 인격체가 될 터였다. 나는 점차 피폐해지고 있었다. 피폐가 무엇일까. 스스로 피폐해지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그것의 정의를 알아도 ‘피폐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나왔다. 아무래도 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디에 적기 싫은 일주일 하고도 며칠이 더 지나 중간고사의 성적이 발표되었다. 몇몇 선생님은 대략 등급이 이렇게 나올 것 같다고 알려주기도 했고, 거의 모든 과목에서 나를 비롯해 친구들은 서로의 점수를 물어보고 비교하며 등급을 예측하기에 바빴다.

100% 확정도 아니고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어느 정도에 머물러 있는지 알면 모르는 것보다는 무언가 마음이 놓였다. 나는 1학기 때와 비슷한 등급이 나올 것 같았다. 감정이 풍부할 때라면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겠지만, 사실 이제 와서는 별 상관이 없었다. 아쉬움과 절망이라는 감정이 없어지고 있어서인지, 무언가 내가 강한 결심을 하고 있어서인지, 명확히 이유를 밝히지 못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내가 오자마자, 가방 내려놓을 틈도 없이 엄마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등급은 대략 어느 정도로 나올 것 같아?”

“…아마, 일 학기 때랑 비슷할 거 같아요.”

“…. 바뀐 게 없어?”

“거의요. 내려갈 수도 있고….”

“내려갈 수도 있다고?”

“…네.” 내가 외마디의 대답을 하자마자 엄마는 눈에 불을 켜고는 말했다.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너 공부 열심히 하라고 조건을 다 만들어줬는데. 지난번에 너 책상 불편하다길래 책상이랑 책장까지 싹 바꾸고, 문제집도 사달라고 할 때마다 바로 사주고, 학원이랑 과외도 보내고 했는데. 일 학기 때보다는 좋아질 거라고 기대 좀 했건만, 바뀐 게 없다고? 많은 애들이랑 제대로 비교해 본 거 맞아?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는 확실하고?”

“…네.”

“…. 잠깐 앉아봐.”

“….” 나는 그제야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거실 쪽의 의자에 앉았다.

“…그거 알아? 엄마 아빠도, 희망이 있었다? 늦게 낳은 하나뿐인 아들, 그저 잘 키워서 좋은 대학 보내고, 좋은 데에 취직해서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어려움 없이 살다가 갔으면 해서, 공부를 시켰어. 뚜렷한 재능이 있는 천재가 아니라면 공부가 성공하기 가장 쉬운 길이니까. …일 학기 때도 삼 등급 정도였고, 중학교 때도 삼 학년 때 잠깐 내려앉은 거 말고는 다 잘했었고. 뭔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어. 마음고생 오래 하면서, 이번에는 좀 더 점수를 잘 받아올 수 있을까 이랬어. 응? 근데, 계속 이러면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 인제 그만할까? 되지도 않을 거에 자꾸 투자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자고. …엄마 아빠도 희망을 가졌었는데, 이제는 힘든가보다.”

“….”

“시간도 늦었는데 나머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아빠까지 해서 나중에 얘기해 보자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서는 책상 밑의 웅크린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까 말까 하는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몸을 말고선 쭈그려 앉았다. 코끝이 찡해졌다. 되지도 않을 거에 자꾸 투자하지 말고…. 되지도 않을 거가 공부일까, 나였을까?

그만두자는 말이 내가 아니라 엄마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약간 우스웠다. 완전히 꼭두각시가 된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꼭두각시라….

중간고사 때, 그 OMR 하나만 마지막에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면…. 예상 등급이 바뀌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 문제만 맞혔더라면 내 앞에 있는 몇 명을 제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과거에 대한 암담한 후회가 나를 괴롭혔다.

과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내가 현재와 미래를 잘 살 수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반대로 즐겁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이하리만치 어긋나는 두 생각은 내 머릿속에서 충돌해 불꽃을 일으켰다.

지금 나의 초라한 처지를 비교하면, 어릴 적의 나는 남 부럽지 않도록 행복했던 것 같다.

기억 속에 파묻힌 한 노래의 음정이 생각났다.

곧 가사도 함께.

꼭두각시 인형 피노키오 나는 네가 좋구나

장난감의 나라 지날 때는 나도 데려가 주렴

숙제도 많고 시험도 많고 할 일도 많아 바쁜데

너는 어째서 놀기만 하니 청개구리 피노키오야

우리 엄마 꿈속에 오늘 밤에 나타나

내 얘기 좀 전해줄 수 없겠니….

학교 다니고 학원 다니고 독서실 가면 바쁜데

너는 어째서 게으름 피니 제페토 네 키노피오야

엄마 아빠 꿈 속에 오늘 밤에 나타나

내 얘기 좀 전해줄 수 없겠니

피노키오 줄타기 꼭두각시 줄타기

그런 아이 되지 않게 해줄래~ ….

…처음 가사가 뭐였더라?

피노키오 줄타기 꼭두각시 줄타기

그런 아이 되지 않게 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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