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잃은 인간의 모습은 피폐의 정점을 보여준다.
책의 첫 페이지가 펼쳐지는 순간부터, 나는 끝을 보고 있었다.
책의 첫 페이지가 펼쳐지기 한참 전부터 내 꿈은 사치가 되었고, 나는 꿈을 찾는 것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해야만 했다.
희망이 뭘까?
여태까지 내가 보았던 것 중 희망과 가장 가까운 이미지 두 개를 떠올려보았다. 내가 그토록 찾던 것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또 하나는, 형광등이었다. 형광등은 내게 딱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계속되는 형이상학적인, 또 허무하고 황당한 질문 속에서, 또한 그것의 부재 속에서 허무함이라는 감정에 절은 한 인간의 정신은 지속해서 피폐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한참을 시멘트 색깔의, 회색 지대 한가운데에서 그 벽만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중얼대는 꼴은 썩 보기 좋지 못했다. 다른 질문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다. 나를 기다리는 것은 더욱 깊어지는 절망과 불안뿐이었다. 숨 쉴 틈조차 없는 이 상황에서, 내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사실은 단 하나였다. 출구는 정말 가까이에 있었다.
· · · - - - · · ·
시리고, 아리고, 쓰린 겨울날. 창문 밖의 풍경은 여느 때와 같은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의 이름 모를 무수한 회색 사물들, 깔끔하게 말하자면 무채색이었다. 주위는 늘 똑같았지만, 나는 달랐다. 방 안은 책상 위 조명에서 나오는 한 줄기 빛을 제외하면 어둠에 잠겨있었고, 침대 머리맡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에는 한 장의 큰 종이와 내가 아껴 쓰던 펜이 있었다.
원고의 결말을 쓰는 동안 손은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평온했다. 몇 달 전부터 한참을 괴롭히던 수전증이 드디어 나를 놓아주나, 싶었다.
그다음으로 나는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차가운 철제 만년필 중심부를 잡으면, 밑쪽을 잡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는 예리한 펜촉의 감각이 아직도 내 손에 서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펜을 잡고 있으면, 그 예리하면서도 차가워 제법 따뜻한 내 피부와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은 그동안 내가 떠안고 있던 무거운 돌덩이들을 차례차례 떠올리게 했다. 돌덩이들에 짓눌렸을 때 느끼는 감각과 철제 만년필을 꽤 오래 잡고 있을 때 느껴지는 감각은 비슷했다.
무거운 돌덩이를 들고서 버티며 달려온 길 끝에서, 나는 더 이상 나아갈 힘을 잃고 말았다. 끝에, 그러니까 내가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절망이라는 거대한 돌덩이가 내 왼 어깨를 짓눌렀고, 오른 어깨는 또 다른 것이 짓누르고 있었다. 그 둘은 내 좁은 어깨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기에, 나는 내 희망에게 인생에 관한 것을 물으러 갈 채비를 했다.
“희망을 찾으러 가자.”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펜을 내려놓았다.
나무로 된 탁자 위에 내 연극의 종막 중에서도 가장 끝부분인 마침표를 두고, 나는 다시금 회색 지대로 향했다. 회색 지대는 줄지어 늘어선 무채색의 학원가를 은유하는 말이었다.
곧 계단을 올라가자, 일기예보대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 아래서 희망 위에 첫눈이 소복이 쌓이는 풍경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 역시 희망을 찾으러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희망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이상한 말인가? 희망을 찾으러 오지 않았지만, 희망을 찾으러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내 머리가 맛이 가버린 것이었다.
…어쨌건, 나는 희망과 가장 가까워질 준비를 마쳤다.
여태껏 찾아왔던 그대에게 찔려 끝을 맞이하겠노라 생각하면 히죽거리는 웃음이 나왔다.
희망이란 무엇일까.
나는 분홍빛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눈을 맞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불쌍한 철마는 석탄과 물의 공급의 부재 속에서 서서히 속도를 늦추다가, 이내 멈추고 말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개나리 가지가 꺾였다.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산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우리의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