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선생님 어떠니?”
“착해요.”
어른에게 ‘착하다’는 표현이 과연 맞을까요? 그런데 세품아에 온 아이들이 타인을 칭찬할 때 사용하는 최고의 표현은 ‘착하다’입니다. 어휘력 부족도 한몫하겠지만, 아마도 아이들이 살아오면서 그나마 들어본 긍정적인 평가가 바로 ‘착하다’일 겁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칭찬의 언어가 ‘착하다’에 머물러 있다면,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 또한 그 한계 안에 갇히게 됩니다. 아이들은 ‘착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억누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 ‘착함’의 기준이 너무나 모호하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른에게 순종하고, 말썽 피우지 않으며, 자기주장 없이 조용한 아이를 ‘착한 아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런 착함의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거나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아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은 그 착함의 틀이 존재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사는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혼란 속에 빠질 겁니다. 아이는 ‘착한 아이’가 되기를 포기하고, 정반대의 언행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길을 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각 어른마다 생각하는 착함의 틀을 귀신처럼 찾는 능력의 소유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세품아에 오는 대부분의 아이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착하다’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경계합니다. 칭찬에 인색한 것이 아니라, 그 모호한 단어 속에 아이를 가두지 않기 위함입니다. 아마 착하다는 칭찬을 들은 아이는 자기가 무엇 때문에 칭찬받았는지 모를 확률이 높을 겁니다.
대신 우리는 아이의 구체적인 ‘행동’과 ‘변화’를 언어로 표현해주려 노력합니다.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아이에게는 신뢰를 표현합니다. “네가 했으면 믿을 만하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잠깐 확인만 할게.” 자기감정을 서툴게라도 표현하기 시작한 아이에게는 “오! 이런 말도 할 줄 알아? 조금 더 얘기해 줄 수 있어?”라고 응답합니다. 동생을 챙기는 아이에게는 그 다정한 마음으로부터 퍼질 영향력에 대해, 어려운 과제를 끝까지 붙잡는 아이에게는 마지막 결과 때 행복할 우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아이들이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감 있는 사람, 다정한 사람, 끈기 있는 사람, 용기 있는 사람, 그리고 때로는 화낼 줄도 아는 솔직한 사람. 이처럼 다채로운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한 명의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한 가지 색으로 아이들의 모든 가능성을 덮어버리기에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세계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