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옷

by JS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을 두려워합니다. 팔뚝과 등판을 뒤덮은 강렬한 문신, 입만 열면 튀어나오는 거친 욕설, 그리고 세상을 다 집어삼킬 듯한 살기 어린 눈빛.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이런 아이들을 마주치면 보통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위압감을 느끼고 시선을 피합니다. 뒤돌아서서 ‘요즘 애들은 무섭다’고 혀를 차면서 말이죠.


하지만 아이들과 밥을 먹고 함께 뒹굴며 사는 제 눈에는 그 모습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제게는 그 위협적인 문신과 욕설이 강함의 증명이 아니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벌벌 떨고 있는 아이의 표정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들은 강한 척하는 맹수가 아니라, 공격당할까 봐 두려움에 떨며 짖어대는 강아지일 뿐입니다.


이 시각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갑옷’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들은 부모님이 입혀준 든든한 ‘갑옷’을 입고 세상에 나옵니다. 이 갑옷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철보다 단단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투구, ‘경제적 지원’이라는 방패, 그리고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는 ‘따뜻한 가정’이라는 견고한 갑옷 말입니다. 이 갑옷을 입은 아이들은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넘어져도 무릎 좀 까지고 맙니다. 친구와 싸우거나 시험을 망쳐도, “괜찮아, 다시 하면 돼”라는 부모의 지지 덕분에 치명상을 입지 않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갑옷 안은 따뜻하기에, 아이들은 여유를 가질 수 있고 타인을 배려할 힘도 생깁니다.


하지만 이곳 세품아에 오는 아이들은 팬티 한 장 걸치지 않은 맨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갑옷을 입혀줄 부모가 없었거나,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에서 학대와 방임이라는 칼날에 입고 있던 갑옷마저 갈기갈기 찢겨진 채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입니다.


맨몸으로 전쟁터 같은 세상을 산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갑옷 입은 사람들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지는 산들바람조차, 이 아이들에게는 살을 에는 칼날처럼 쓰라립니다. 남들에게는 작은 장난인 돌멩이 하나가, 이 아이들에게는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기저에 깔린 가장 큰 정서는 ‘분노’가 아닙니다. 바로 생존에 대한 극심한 ‘불안’입니다.


너무나 불안하기에 아이들은 과도하게 반응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과각성’ 상태라고 합니다.


새로 온 아이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다른 아이와 시비가 붙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유는 대부분 사소한 시선 때문입니다.


“저 새끼가 절 꼬라보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제가 밥인 줄 안다고요!”


이 아이의 과거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됩니다. 거리 생활을 하며, 혹은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눈을 마주치거나 틈을 보이는 순간 날아왔던 무차별적인 폭력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타인의 시선은 관심이 아니라 ‘공격의 신호’입니다. 그래서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물어뜯는 것, 그것이 아이가 배운 슬픈 생존 본능입니다.


온몸을 뒤덮은 문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멋을 부리기 위해, 혹은 조폭 흉내를 내기 위해 문신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맨몸인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약해 보일까 봐, 스스로 몸에 그려 넣은 ‘가짜 갑옷’입니다.


“나 건들지 마! 나 사실 되게 무서운 놈이야! 이거 그냥 문신 아니고 이레즈미야. 그러니까 제발 나한테 시비 걸지 마! 나 좀 무시하지 마!”


그 화려한 그림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는 처절한 경고문이자, 제발 나를 보호해 달라는 역설적인 호소입니다.


어른들이 이 아이들의 거친 겉모습 뒤에 숨겨진,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읽지 못하면 교육은 시작될 수 없습니다. “학생이 문신을 해? 지워!”라고 혼내는 것은, 추워서 덜덜 떨며 신문지라도 덮고 있는 아이에게 신문지를 뺏으며 “거지같이 이게 뭐야!”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신문지를 뺏으려면, 먼저 따뜻한 외투를 입혀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맨몸인 아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스스로 마음의 근육을 키워 세상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잠시나마 우리가, 그리고 사회가 그들의 갑옷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갑옷이 되어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이가 뱉어내는 욕설과 가시 돋친 말들을 튕겨내지 않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실수를 해도 “네가 그러면 그렇지”라며 비난의 화살을 쏘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있어. 다시 해보자”라며 막아주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줄 때, 아이는 비로소 긴장을 풉니다.


실제로 세품아에서 지내며 안전함을 느낀 아이들은 놀라운 변화를 보입니다. 처음 왔을 때 밤마다 악몽을 꾸고 작은 소리에도 깨던 녀석들이, 어느 순간부터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집니다. 눈빛에 가득하던 독기가 빠지고, 장난기 가득한 제 나이 또래의 눈망울로 돌아옵니다. 더 이상 문신을 자랑하지도, 욕설로 자신을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굳이 센 척하지 않아도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악마가 아닙니다. 그저 너무 오랫동안 발가벗겨진 채 추위에 떨었던 아이들일 뿐입니다. 그 떨림을 멈추게 하는 것은 더 큰 공포나 처벌이 아닙니다. 따뜻한 온기, 그리고 “이제 안전해”라는 믿음,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아이들의 문신을 보며 생각합니다. 언젠가 저 그림들이 위협의 수단이 아니라, 그저 철없던 시절의 낙서처럼 느껴질 만큼 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단단하고 따뜻한 진짜 갑옷이 생기기를. 그리고 그때까지 제가 기꺼이 이 녀석들의 낡은 갑옷이 되어주겠노라고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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