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니까.

by Dancing with God

어느 일요일 아이와 아침을 먹으며 무심결에 실외기를 봤는데, 하얀 연기가 김처럼 피어오르더니 끼익 끼익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서 밖에 나가 확인해 보니 히터 실외기에서 집 안의 따뜻한 공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옆의 다른 집들 실외기는 열심히 바깥 공기를 흡입해 따뜻한 공기로 만들어 집으로 옮기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집 실외기에서만 정 반대의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저장해 놓고, 걱정이 되어 히터를 껐다. 그리고 히터 없이 아이와 하루를 연명하고 월요일 바로 수리 신청을 했다.


오전이 다 지나도록 엔지니어 연락이 없어 클럽 하우스로 찾아가서 물어보니, 이런 경우에는 일요일에 emergency call을 하면 바로 온다면서, 이번 건은 월요일에 자기들이 신청을 해놓았으니 기다리라면서 임시로 쓸 수 있는 전기 난로 두 개를 집에 갖다 주었다. 원래 같았으면 당일 엔지니어가 찾아와 보기라도 하는데 연락이 없자 나는 마음이 급해 다시 찾아가 하소연을 했지만, 매니저는 오늘 올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그래도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나는 일요일에 신청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 날 저녁 때 매니저가 자기가 열심히 알아봐줘서 오늘 엔지니어가 올 수도 있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그러더니 정말 예외적으로 6시가 다 되어 엔지니어가 왔다. 내가 동영상을 보여주며 설명하는 걸 고개를 끄덕이며 듣더니, 이건 히터 시스템의 defrost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거라고 안심시켜 주더니 그래도 점검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air leak이 있다며, 부품을 주문하면 2일 정도 소요되니 그 동안은 히터를 끄고 있는 게 좋겠다고 하며 실외기와 내부 thermostat을 모두 끄고 돌아갔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고, 한 주가 다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미국 시스템이 느리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아이가 아프고 바깥 기온이 점점 내려가니 걱정이 되었다. Request를 해도 아직 부품이 오지 않았다며 기다리라는 대답 뿐이었다. 전기 난로 두 개로는 도저히 온도 유지가 불가능했다. 결국 air leak이 있더라도 히터는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 겨우 실외기 전원 버튼을 찾아 모두 on으로 바꿔 히터를 다시 돌리면서 기다리는데 정말 이 미국의 느린 시스템이 질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이렇게 진심으로 든 적은 1년 여 만에 처음이었다.


Request를 한지 열흘이 지나고 이번 주말에는 영하 8도까지 떨어지고 휴일도 있어서 걱정이 되었다.기다림의 미덕을 계속 훈련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자꾸 내가 재촉하는 것이 미국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도 하다가, request가 누락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타운하우스 회사 쪽으로 연결된다는 채팅창에 글을 올리고 leasing office manager에게도 다시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오후가 되니 회사에서 새로운 engineer들이 찾아와 air leak과 상관없는 다른 부분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부품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다른 더 빨리 고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전체적으로 점검을 하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manager에게는 request는 누락되지 않았고 계속 부품을 구하는 중이라면서 village 내의 모델 하우스나 호텔에 머무를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생각지 못했던 그들의 해결책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village 내의 집은 사는데 필요한 가구가 부족할 것 같았고, 호텔은 어디든 너무 멀었다. 일단 짐을 옮기는 것이 너무 번거롭게 생각되었고, 히터가 아예 안돌아가는 것도 아니니 이번 주에는 부품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금요일이 되어 아이가 클럽 하우스 행사에 가고 싶어해서 따라 갔더니, manager가 다시 모델 하우스 이야기를 했다. 알고 보니 모델 하우스는 모든 furniture와 식기들이 완비되어 있어서 air bnb처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보여주겠다고 해서 확인해 보니 우리 집과 가까웠고, 몸만 들어가면 살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우리를 위해 오늘 청소까지 했다고 했다. 아주 멋진 가구들과 냉장고에 가득 들어있는 간식들까지 보니 아이가 너무 좋아할 것 같아서 얼마나 머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키를 받아두었다.


그리고 금요일 밤부터 벌써 4일째 모델 하우스에 머무르고 있다. 아이는 아주 좋은 호텔에 온 것 같다면서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하고 간식을 빠른 속도로 해치우고 있다. 아이 친구가 주말에 놀러왔을 때는 두 집을 오가면서 노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나는 몇 번씩 짐을 나르는 것이 처음에 너무 번거로웠지만, 좋은 가구들과 새로운 위치에서 볼 수 있는 뷰를 보면서 익숙해지고 있다. '빨리 부품이나 가져오지' 하는 생각에 답답했고 이렇게 내가 생각지 못한 해결책을 받고 당황스러웠는데, 이 나름대로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즐기고 있다. 류시화 시인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책에서 읽은 내용이 마음에 와 닿는다. "우연을 거부하는 것은 신의 계획을 무효화시키는 것과 같다. 인생은 길을 보여 주기 위해 길을 잃게 한다. Plan A보다 Plan B가 더 좋을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더 좋다. Plan A는 나의 계획이고, Plan B는 신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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