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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작가 Sep 20. 2020

문경에서 만난 서울 가야금 소녀

문경 소녀 일기 (6)



문경에 연고도 없는 내가 그나마 외로움과 싸울 수 있었던 건 같은 도시, 서울에서 온 가야금 언니 덕분이었다.


혼자 방을 썼다면 나는 이미 고독이라는 블랙홀에 빠져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야금 언니와 같이 한 방을 쓰게 된 나는 다행히 블랙홀 따위는 만들지 않았다.



가야금 언니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는 허니버터칩이다.



문경에서의 첫날,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는 소셜다이닝이 있었던 그날. 다 같이 밥을 먹고 치웠지만 마음 한편은 쓸쓸했다. 서울에서 온 나도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나도 모르게 순간 '가족이랑 밥 먹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일상적인 일과를 낯선 타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저, 숙소 가려고 하는데 혹시 어떻게 가시나요?"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는데 숨고 싶었다. 숙소에 가서 꼬깃꼬깃 숨겨뒀던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시 펼쳐 대면하고 싶었다. 그게 필요했다.


"숙소 가세요? 잠시만요."



가야금 언니가 틀어놓은 티비 덕분에 나는 집에 와있는 듯한 안정감이 들었다.



가야금 언니와 함께 뮤지션 그룹을 꾸린 그는 내 보라색 트렁크를 들어 차 뒤에 실어 주었다. 나는 그의 차 뒷좌석에 앉았다.


"무슨 프로젝트 지원했어요?"


"글쓰기 원데이 클래스요."


"어떤 클래스인가요? 글쓰기면 캘리그래피?"


"아.. 아뇨! 음.. 글을 자유롭게 쓰게 하는 클래스요."


나도 클래스 준비는 1도 안 된 사안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답변했다.


조수석에 앉은 가야금 언니의 긴 머리 찰랑거렸다. 서울, 수도권에서 왔다는 그들 뒤에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안도감이 들어 조용히 침을 삼켰다.



가야금 언니는 야무졌다. 이불들을 여러 개 겹쳐 두껍게 만들어 잠자리를 편하게 했다.



숙소에서 침대를 기대했던 서울깍쟁이 소녀는 바닥에 놓인 이불들을 보고 다소 당황했다. '본격 시골 살이 시작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뭐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다 해보는 거지 뭐.


가야금 언니는 침대 못 되더라도 푹신한 이부자리를 만들어줄 이불 개수가 모자란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불 몇 개를 부탁했다. 그의 존재가 문득 궁금해졌다.


언니보다 나이 많은 오빠였고, 올해 초 같이 음악 하자고 함께 연주하게 됐다고 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 의지할 수 있는 파트너가 있는 그들이 내심 부러웠던 것 같다.



달콤한 키위와 시큼한 자두의 요거트 범벅. 완벽한 아침상이었다.



다음날 아침, 가야금 언니는 과일을 씻고, 깎아 과일 요거트를 만들어 주었다. 일 아침, 부지런히 과일을 준비해 가족들이 먹을 과일 요거트를 만들어주시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익숙함, 친근함 그리고 따뜻함.


전날 밤 함께 슈퍼에 들른 가야금 언니는 내게 빠삐코도 사주었다. 어렸을 적 먹었던 그 초코맛에 나는 어젯밤 울지 않고 잠에 들었다.



가야금 언니가 가고 남긴 빈자리는 생각보다 꽤 컸다. 빈 옷걸이들.



그런 언니가 떠났다. 물론 문경 내 다른 집으로.


"언제 올 거야?"

"알써. 빨리 갈게. 헤헤."


언니는 댕댕이라고 불린다던데 나에게 언니는 드넓고 푸릇푸릇한 들판의 해바라기와 같은 존재. 언니와 같이 또 다른 집에서 살게 될 그날을 상상하며 나는 서울에서 또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올라왔다. 문경 살이 짐이 더 늘었다. 캐리어도 2개가 되었다.






지난 7월, 서류를 넣었던 곳에서 갑자기 소식이 날아왔다. 문경에 정착한 지 단 일주일 만에 생긴 일이었다.





나는 이 일을 문경새재의 맑은 정기가, 문경에서 만난 사람들의 좋은 에너지가 불러 넣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문경 소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경 소녀'와 작별인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3가지 아쉬움이 들었다. 나에 대한 아쉬움, 문경에서 펼쳐질 일들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문경에서 만난 인연들에 대한 아쉬움.




시간을 두고 여러 차례 고민하다 입을 뗐다.


"언니, 나 다시 서울에 가게 되었어."


그는 내 이야기를 다 듣더니 말했다.


만나려고 그랬나 보다.


그의 말이 뜯기고 튕겨져, 살포시 내 마음 위에 안착했다. 나의 서툰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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