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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쉬운 독서모임

장르의 힘?

by 지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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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소설가의 북토크를 다녀온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내가 가장 많이, 자주 읽는 책이 소설이다 보니 북토크 역시 소설을 중심으로 한 자리에 가게 된다.

여러 소설가의, 소설책을 중심으로 한 북토크에 다녀보았지만 같은 느낌을 준 북토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같은 소설, 소설가가 아니니 모두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심지어 같은 소설가의 한 소설을 중심으로 한 여러 자리라 하더라도 그 내용과 느낌은 모두 다르다. 날짜가 다르고 공간이 다르고 무엇보다 그 자리에 함께 하는 사람이 다를 테니 말이다.


올해 초 두 SF작가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평소 자주 가던 서점과 래빗홀 출판사의 콜라보로 진행한 이벤트 중 하나로 열린 북토크였다. 정보라 작가와 정소연 작가, 두 소설가가 함께 참여하는 자리였다. 이전까지 난 두 작가를 알기는 했지만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부랴부랴 『너의 유토피아』와 『미정의 상자』두 소설집을 구매했다. 그 당시 정보라 작가는 부커상을 비롯해 전미번역상, 필립 K 딕 상의 후보에 오르는 눈에 띄는 행보를 보여주었기에 아주 큰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기대는 배신하지 않았다. 각각의 단편이 모두 특이하였고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미정의 상자』는 북토크 당일 기준, 출간된 지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미리 읽지 못하고 행사 시작 전, 한두 시간 정도 시간을 내 읽었다. 당시 절반이 조금 안 되는 분량밖에 읽지 못했지만 충분히 이 소설집이 훌륭한 책이란 걸 알 수 있었다. 1부와 2부로 나뉘는 이 소설집의 1부, 카두케우스 이야기에는 우주여행이 가능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9편의 연작소설이 실려있었다. 그 하나의 설정을 공유한 여러 소설들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저녁이 되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북토크가 시작됐다. 담당 편집자의 소설 속 상황을 활용한 밸런스 게임을 시작으로 북토크는 유쾌하게 진행됐다. 두 작가가 서로 자신이 쓴 상황이 그래도 낫지 않느냐 말하며. 처음을 즐겁게 풀어내서인지 북토크 전체적 분위기도 그러했다. 묻고 답하고 웃고.

본격적으로 물은 첫 질문은 두 작가의 책이 모두 개정판으로 나왔는데, 이전 원고를, 교정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이다. 정보라 작가는 각주를 왜 이런 식으로, 출처를 이상하게 썼을지 의문이었다고 답했으며 정소연 작가는 이미 훌륭해서 고칠 게 없는데 왜 내가 교정지를 받아보게 된 건지 의문이라 했다. 전혀 예상 못한 두 대답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특히 정소연 작가의 대답에. 이는 단순히 자기 자랑이라기보다는 정소연 작가의 집필 방식과도 연관 있었는데, 글을 쓰기 전에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기에 쓰고 난 후에는 많은 수정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많은, 깊은 생각 후에 쓰기. 많은 작가들이 말하는 것이자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 다시 한번 새겨본다.

그 후에 SF란 장르에 빠져들게 된 이유에 대해 물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준 전집을 읽은 게 계기가 되어라는 이유 그리고 SF가 먼 미래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현재의 이야기를 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좋아하게 되었다는 대답이 나왔다. SF를 쓰는 이유와 읽는 이유가 이렇게 닿아 있다고 느꼈다. SF소설가는 하고 싶은 현재의 감정, 사건, 이야기를 과학, 기술, 미래에 대한 상상을 통해 적어 낸다. 그리고 그걸 읽는 이들은 그 이야기 안에서 현재의 것들을 발견한다. 비단 SF뿐만 아니라 모든 이야기가 결국 '현재'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이자 번역가이기도 한 두 작가에게 소설 집필과 번역 중 어떤 작업이 더 좋은지?부터 어떤 이야기를 앞으로 쓰고 싶은지? 쓰고 있는지? 에 이어 한국 출핀 시장에 대한 논의까지 나아갔다. 단편과 장편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나라마다 다른데, 한국은 단편에 대한 반응이 가장 좋은 나라라고 정보라 작가가 말했다. 유럽이나 호주 등을 방문하면서 그곳의 독자들 중에는 단편을 아예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호주의 한 서점에서 도서에 사인을 하던 중 한 독자가 책에 대해 물었고 단편집이라 답하자 자신은 단편을 안 읽는다며 지나갔다는 일화를 말해주기도 했다. 그렇기에 정보라 작가는 장편만을 써야 하는 게 아닌,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축복받은 일이라 말했다. 진행을 맡은 편집자 역시 타이베이에 열린 도서전에 가서 여러 에이전시를 만났을 때 단편 판권을 파는 일이 어려웠음을 말하기도 했다. 지금은 한국 단편의 인지도가 많이 높아져 조금 수월해지긴 했다지만 말이다. 그전까지는 소설의 분량, 길이에 따라 호불호가 나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이야기는 모두 좋아했기에 그랬다. 둘 중 어떤 분량의 이야기를 더 선호하냐고 하면 둘 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단편은 단편 나름의 맛이 있고 장편은 장편 나름의 맛이 있으니까. 어떤 분량의 소설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각자 자신에게 맞는 크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편의 크기를 가진 이야기는 단편으로 쓰이고 장편의 크기를 가진 이야기는 장편 소설로 쓰인다. 그뿐이라고.

역시나 북토크의 마지막은 독자 질문 순서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난 참여하였다. 마지막 순서로 말이다. 다소 평이하지만 궁금했던, 서로의 소설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 무엇인지? 에 대한 질문이었다. 정보라 작가는 정소연 작가의 『미정의 상자』에서 표제작인 <미정의 상자>를 골랐고 정소연 작가는 정보라 작가의 『너의 유토피아』에서 <One More Kiss, Dear>를 꼽았다. <미정의 상자>는 전염병이 도는 시기에 한 상자를 주운 뒤 서서히 과거로 가게 되는 이야기로 정보라 작가는 팬데믹 시절 본인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큰 공감이 되었다 했다. <One More Kiss, Dear>는 인공지능 엘리베이터의 시점에서 쓰인 소설로 정소연 작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쓰고 싶은 이야기라고 이야기했다.


SF라는 장르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자리였다. SF소설을 어려워하거나 멀게 느끼는 독자를 종종 보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과 이 북토크를 추천해주고 싶었다. SF를 가까이하지 못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이유는 자신과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SF=나와 먼 이야기'라는 공식은 틀린 가설이었다. 결국 SF는 현재, 우리의 사건, 문제를 말하는 장르였으니 말이다. 멀어 보이는 감정과 사건들 속에서 현재 나의 모습 우리의 과제를 떠올리는 것, 그것이 SF 장르의 재미였다.

이전에도 SF 소설을 선정해 독서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모임 자체는 재밌고 좋았지만 부족함을 느꼈던 것은 좀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알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이었다는 걸 이 북토크에 참여함으로써 깨달았다. 작가의 이야기를 들음을 통해 더 많은 디테일을 알게 되고 깊은 고민을 해볼 수 있었다. 읽는 이들끼리 모여 독서모임을 하는 것만으로도 더 깊은 읽기가 되지만 그 책을 쓴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통해서 역시 더 깊은 독서가 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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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SF 작가의 북토크를 다녀오기 한 달여 전, 작은 규모의 또 다른 북토크에 다녀왔다. <산으로 가는 북토크>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성혜령 소설가의 『산으로 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버섯농장』까지 함께 다룬 자리였다. 여러 문학상에 후보로,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가였기에 그리고 북토크가 있기 얼마 전 우연히 서점에서 그녀를 마주쳐 사인을 받았기에 (나 혼자) 운명이란 마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6명이란 소박한 인원으로 진행된 북토크였다. 작가가 설명해 주고 독자가 듣는 자리라기보다는 독자가 묻고 작가가 답하거나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느낌의 쌍방향적 자리였다. 이 정도 작은 규모의 북토크는 처음이었기에 어떨지 기대되었는데 대규모 북토크보다도 더 재미있고 기억에 남았다. 규모의 차이에 따른 장단점이 있겠지만 내게는 작은 규모에서의 장점이 더 크게 다가왔다. 듣기만 하는 것보단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 역시 내게는 더 맞았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자신의 감상을 작가에게 전해주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규모 북토크가 마련되는 것보다 큰 규모의 자리가 더 많은 것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두 책과 더불어 다른 단행본에 실린 성혜령 작가의 소설들까지 읽고 자리했다. 그녀의 소설은 순문학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그것으로만 한정 짓기엔 좀 부족한 거 같다. 때로는 섬찟하고 때로는 통쾌하며 어떨 때는 괴기스럽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하드보일드 소설이나 범죄 스릴러 소설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그런 장르의 틀에 딱 맞다는 생각도 들지 않지만 말이다. 순문학과 범죄 소설의 경계를 오가며 인간의 심리를 섬뜩하게 그려내는 게 그녀의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북토크에서 그녀의 소설에서 좋았던 문장 몇 개를 전달했고 대부분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며 결말을 정해 놓고 소설을 쓰는지 물었다. 결말의 경우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긴 하지만 수정되는 경우도 꽤 많다고 했다. <버섯 농장>역시 그렇게 결말이 바뀌었다고. 이어서 난 『산으로 가는 이야기』에서 모든 이야기의 끝이 좋았지만 특히 두 번째 소설, <꿈속의 살인>의 결말이 가장 좋았다고 얘기했는데, 성혜령 작가는 다행이라며 사실 세 편의 소설 중 두 편이 미발표작이라 꽤 걱정되었다고 밝혔다. 의외였다. 많은 문학상의 후보로 오르는 소설가도 새 작품을 공개할 때 긴장을 하는구나 싶었다.

소설 하나를 가지고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오갔다. 그건 공감이기도 다른 의견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소름이 돋았다는 느낌만은 공통되었다. 물론 소설이 좋아 소름 돋았다는 기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보단 정말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이야기였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소설을 읽다 소름이 돋아 뒤를 돌아보게 하는 미스터리 한 이야기들이라는.

다음 집필 계획을 마지막으로 물었고 그녀는 사이비 종교를 소재로 한 장편을 써보고 싶다고 얘기했다. 성혜령 작가가 쓰는 사이비 종교 이야기는 어떨지, 아주 궁금해졌다.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본가에 가는 도로에 있는 종교 시설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 주었다.


그동안 나는 추리, 미스터리 소설과 잘 맞지 않는다고 느꼈었다. 물론 몇 편 읽어보고 흥미를 느끼기도 했지만 왜인지 손이 잘 가는 장르는 아니었다. 그건 아마 내가 계속해서 범인, 범행 동기 등을 추리하려 하는데 그 정답에 자꾸 빗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성혜령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재미를 느꼈다. 누가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떠올릴 새도 없이 사건은 벌어진다. 거기에 나도 어느새 휘말려 있다. 강제로 이야기 안에 빠져들게 하는, 목격자 혹은 공범이 되게 하는 소설의 매력을 알아버렸다.


소설에 장르를 나누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장르가 이야기를 가두는 틀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와 역할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르를 나누고 분류하는 것에는 단지 그런 기능만 있진 않을 것이다. 읽는 이의 선택을 쉽게 해 주고 취향을 설명해 주는 것뿐 아니라 창작자들 역시 자신이 쓰는 이야기의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르가 이야기를 하나로 가둔다고 볼 수도 있지만, 장르는 여러 개가 함께하기도 섞이기도 한다. 한 이야기를 한 장르로만 말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지 않을까.

더 많은 장르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SF, 판타지, 로맨스, 추리, 스릴러, 드라마 등등. 모든 장르의 이야기를 섭렵해 보고 싶다. 아니, 한 장르를 끝까지 진득이 파보고 싶다. 둘 다 쉽지 않을 듯하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그래도 못할 건 없지 않을까. 하나씩 차근차근 같이 하면 끝내지 못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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