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선”
오늘도 선이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구두를 욱여넣고 있는데, 어머니가 등 뒤까지 쫓아와 성화다.
“이번에는 꼭 잘해야 한다. 이게 어떻게 성사된 기회인데, 그 나이에 한의사 집안이 어디 흔한 줄 아니? 저번처럼 싹수없게 굴지 말고! 꼭 집까지는 바래다 드려. 알겠지?”
“아, 알겠다고요! 저 나가요.”
자못 짜증을 내며 나갔지만, 사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쨍한 하늘에 바람까지 살랑이자,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머니가 귀가 닳도록 얘기한 한의사 집안의 '어여쁜 그녀'의 외모는 어떨지, 혹 그녀가 나에게 반한다면 어떻게 남자답게 대응해야 할지, 어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처음 만난 날, 진도 끝까지 나간 썰'의 주인공이 되는 거 아닌지. 조금씩 올라오던 기대는 결국 머릿속에서 폭발했다. 이제 그 분화구에 그녀와의 로맨스를 채우면 될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대로 나간다면 하수처럼 보일 것 같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조언대로 편의점에 들러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한 장비를 마련했다. 지갑 속에 욱여넣으니, 왠지 모를 우월감이 들었다. 오늘 예감이 좋았다.
사실 아직 선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진 않았다. 친구들이 말하는 소개팅이나 헌팅, 심지어 핸드폰을 들면 쉽게 만남이 이뤄지는 애플리케이션까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경로는 다양했고, 나 또한 그 수혜를 충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심했던 까닭일까. 나이는 느끼지도 못한 새에 미세먼지처럼 코밑까지 다가왔고, 그 흔한 핸드폰의 알림 소리 또한 생소하기에 이르렀다. 주변의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을 했거나 비혼을 선언하여, 어느새 미리 약속을 잡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었다. 난 비혼 주의자도 아닐뿐더러, 성소수자도 아닌, 지극히 여성을 사랑한 - 아니 밝히는 그저 나이 많고 경험 없는 초라한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왕년의 나는 이러지 않았다. 나는 그룹의 중심이었던 사람이었다. 내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모두들 내가 입는 옷을 부러워했고, 내가 찬 시계를 우러러보았다. 그들은 카시오 시계를 찰 때, 나는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었다.(아버지 시계였지만) 대학교에서는 나 혼자만이 차를 타고 다녔다.(어머니 차였지만) 엠티를 갈 때면 내 차를 타려고 하는 여자 후배들이 줄을 섰고, 내 주변에는 잘생기고 키 큰 친구들이 가득했다. 그 친구들과 함께 나의 주말은 항상 약속이 꽉 차 있었다. 미팅이나 술자리 등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혼자 점심을 먹어본 적이 없었으며, 친구들 모두가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항상 중심이었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다들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구들과의 연락이 뜸해졌다. 주말마다 친구들에게 클럽에 가자고 연락했지만, 다들 바쁘다는 핑계뿐이었다. 어느 순간 나의 인기는 사그라들었고, 오히려 나보다 못난 범중이나 재훈이가 인기가 많은 사람이 되고 있었다. 그 녀석들이 나보다 나은 게 대체 뭐란 말인가. 그저 키만 큰 녀석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게 꽤나 못마땅했다. 모임이나 술자리가 생겼을 때도, 그 녀석들은 항상 여자들의 관심 대상이었고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옆자리는 매번 비어져 있었다. 삼십 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소개팅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성화가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내게 핑곗거리를 선물했다. 특히 '불가항력적인, 부득이하게' 이 대목을 강조하며, 친구들에게 어머니의 등쌀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선을 나갔다고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만남이란 내 사전에 없고 자연스레 만남이 이루어지는, 아니 더 나아가 (친구들이 생각하는 대로) 여자의 대시가 끊이지 않는 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선이라는 행위에 어울리지 않는 유망주가 이적시장에 '부득이하게' 나와 중매라는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이 나의 모습 이리라.
일부러 주차장에서 잠시 대기했다. 약속시간 전에 먼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여자에게 긴장감을 주어야 한다. 사이드미러로 머리를 정리했다. 엊그제 새로 산 톰브라운 셔츠의 깃이 꽤나 맵시가 좋아 보였다. 뱃살은 예전보다 좀 두툼해졌지만, 명품 벨트가 오히려 잘 보여서 힘을 줄 필요가 없었다. 약속시간에서 오 분이 지나고 나는 주차장을 나섰다. 하늘을 보니 보름달이 보였다. 밝고 투명했다.
‘당기시오’라고 적힌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멀리서 베이지색 투피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것 같다. 그래, 오늘은 예감이 좋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첫인사에 그녀를 슬쩍 스캔했다. 도도하게 웃는 미소를 지나,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 슬림한 허리, 올곧게 뻗은 다리라인을 한순간에 포착했다. 마음속 체크리스트가 요란했다. ‘내 선에 딱 맞는 여성상’이라고 명명한 체크리스트가 바쁘게 선을 긋고 있다.
‘1번 직각 어깨에 체크하고, 2번 덧니 유무도 체크하고, 음… 3번 오다리 여부는 아직 앉아 있어서 보류다.’
체크리스트에 쫙쫙 그어버린 선이 많아질수록, 그녀와 나 사이의 그어진 선이 더욱 얇아졌다. 그녀가 꽤 마음에 들었다. 도도하고 시크해 보이는 모습이 꽤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는 모습에 호감이 있는 것 같다. 자신감이 생겼다. 오늘은 엄마에게 집에 늦게 들어간다고 전화를 해둬야겠다. 선을 침범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즈음, 그녀가 찬물을 끼얹었다.
“초면에 죄송한데 우리 나이도 있고 하니, 그냥 바로 말할게요. 사진이랑 다르시네요. 특히 머리 없는 부분이요.”
그녀는 마치 운동회 계주에서 바통을 넘길 수 없는 이유가 나에게 발이 없기 때문이고, 덕분에 본인은 한 바퀴를 더 돌아야 한다는 사람처럼 차갑게 얘기했다. 내 머리 위 선들의 부재는 내가 바통에 손을 댈 수 있는 자격조차 박탈하고 말았다. 그녀는 사실을 짚었으나 내 심장으로 가는 유일한 핏줄을 짚은 듯 숨이 멈춘 것 같았다. 어느새 체크리스트도 선 긋기를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