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봤습니다 - (2화) 여자의 시선

단편소설 "선"

by 날갯짓

“예전에는 사랑이라는 기회가 언제까지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그런 기회는 점점 흔치 않아”


커피를 놓은 손이 여전히 뜨겁다. 어제 본 영화에서 나온 대사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는데, 다들 그 말에 동감했는지,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물었다.


“맞아, 요새 나도 너무 느껴. 우리도 이제 지는 별인가, 벌써 나이가 이렇게 찼어.”

연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희는 태생적으로 목소리에 애교가 가득하다.


“그러니까. 벌써 30대 후반이라니. 요새 다들 결혼 늦게 한다고 하는 데, 왜 내 주변엔 다 유부들뿐인지 몰라.”

내가 말했다.


“괜찮은 남자도 이제 없어. 예전에는 그래도 가뭄에 콩 나듯 한 명씩 있긴 했는데.”


“괜찮은 남자의 기준이 뭘까?”


“뭐겠어, 그냥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지. 상식 선에서 행동하고,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지.”

케이크를 연신 먹던 정선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요새 만나는 남자는 있고?”

혜수가 내게 물었다.


“아니, 없지.”


“왜 전에 만났던 남자는 어떻게 됐어?”


“누구?”


“있잖아, 그 기타 치던 얘. 사마귀 닮았다고 했던 그 남자. 잘생겼었다며. 오래 만나지 않았나?”

재혁이다. 마른 볼과 좁아지는 하관에 사마귀를 닮았던 그 남자. 삼십 대 초반의 연하남이었다. 우리는 거의 2년을 만났었다.


“헤어졌어. 한두 달 됐나?”


“왜?”


“바람났어, 그 새끼.”

친구들이 작은 탄식을 내며 놀랬고, 나는 무안함에 말을 덧붙였다.


“여사친 때문에. 역시 여사친 많은 놈들은 안돼. 이십 대도 아니고, 이 나이에 여사친을 내가 신경 써야 해? 몇 년 후면 불혹인 내가? 언제부턴가 나보다 그 년을 챙기더라니까. 아프다고 걔 집에 가서 간호해주고. 그러다 보니 바람났지 뭐.”


“대박이다.”


“더 대박인 건, 헤어질 때 오히려 나를 탓하더라니까? 나를 만나면서 죄책감을 느꼈다나 뭐라나. 나는 걔를 위해서 모든 시간과 애정을 투자했는데, 돌아오는 말이 구속이 심하다니. 어이없더라.”


“헐, 괜찮아?”


“응, 생각보다 괜찮더라. 딴 년 때문에 처음 싸운 날 좀 예감이 들었어. 아, 그년 때문에 헤어지겠구나. 하고.”


“그래도 잘 이겨냈네.”


“이겨내긴,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 남자의 불신이 기본 베이스가 되고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실은 잘 이겨내지 못했다. 거의 한 달을 그에게 매달렸다. 매일 집 앞까지 찾아갔다. 엉엉 울며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렸다. 연락을 받지 않는 그놈 집 앞에서 날을 새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재혁이가 내게 관심이 아예 식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나도 점차 괜찮아졌다. 실은 괜찮아진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바람난 전 남자 친구와 처량하게 남아버린 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느새 식어버린 커피 때문인지 씁쓸함이 몸 전체에 퍼지는 듯했다.


“너 나 대신 선볼래?”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혜수가 물었다.


“갑자기? 웬 선?”


“나 볼래, 나 줘 나.”

눈치 없는 연희가 앙탈을 부렸다. 혜수는 연희를 잠시 흘겨보더니, 다시 나를 보고 말을 이었다.


“아니, 나 엄마 통해서 선 계속 들어오잖아. 이번 건 아빠 인맥 때문에 거절하기 좀 난감하네.”

혜수는 한의사다. 혜수의 아버지도 한의사라서, 집안 자체가 한의사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직업이 직업이고, 집안이 집안인지라, 선 자리가 끊이지 않았다. 혜수는 도도했고 당당했다. 그녀는 인위적인 만남을 선호하지 않았다. 결과만을 목적으로 하는 선 자리를 불편해했고, 거기 나오는 남자들을 일종의 패배자들로 인지했다. 수 번의 경험을 통해 남자들에 대한 정보가 정리가 된 것이었다. 혜수의 선에 나온 남자들은 두 부류였다. 도도하고 아름답고 더구나 한의사인 혜수 앞에서 자처해서 을이 되는 남자들이거나, 남산처럼 나온 자신의 배를 쓸어 만지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재력가 아저씨들뿐이었다. 그 속에서 혜수는 선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내 눈엔 배부른 소리로 들렸지만, 혜수는 그렇다고 했다.


“어떤 남자인데?”


“사실 모르겠어. 듣기로는 집안이 좀 괜찮다고 하더라고. 사진은 좀 아저씨 같아 보이긴 해. 나이는 우리보다 두 살 많아.”

혜수가 피식 웃으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보여줬다.


“웬 흑백사진?”

옆에서 정선이 휴대폰을 뺏어가며 물었다. 연희도 휴대폰에 들어가기라도 할 기세로 사진을 보며 품평회 같은 대화를 이어갔다. 야 이거 뽀샵 엄청 했네. 요새 이 나이 남자들도 뽀샵 이렇게 하나? 나보다 심한데? 키는 몇이야? 직업은 뭐 하는 사람이고? 혈액형은 뭐래? MBTI는? 쿨톤인가? 등등 정선과 연희가 흑백사진 한 장을 가지고 열심히 떠들어 댔다.


“어때? 할래?”


“........”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선 자리는 전에도 해봤지만, 썩 좋은 추억은 아니었다. 선에 나올만한 나이 때의 남자들은 열정이 없었다. 머릿속은 계산하느라 바빴고, 쉽게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포기도 빨랐다. 밀당을 허용치 않았으며, 간만 보다가 넘어오지 않을 것 같으면 쉽게 떠나갔다. 또 사귀게 되더라도, 자신이 정해놓은 결혼 상대로서의 프레임에서 조금만 어긋나면 쉽게 관계를 포기했다. 그런 만남은 단순히 소비적이었고 내게 공허함을 불러왔다. 나는 애정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거 너한테 들어온 건데, 내가 나가도 돼?”


“당연하지, 걔 내 얼굴도 몰라. 사진도 안 줬거든. 그리고 내가 선자리 싫어하는 거 엄마도 알고 있어서 알아서 조치했을 거야. 저번에 다른 친구 넘겨준 적도 몇 번 있어서 문제없어. 그냥 부담 없이 나가봐.”


“야 해봐, 결혼할 거면 이렇게 반듯한 사람이 낫다니까. 모델이나 음악 하는 사람은 그만 만나고, 직장 안정적이고 집안 괜찮은 사람 만나. 이제 그만 현실을 봐야지. 언제까지 얼굴 보고 만날래? 사진 보니까 웃는 모습이 사람이 참 바라보이네.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아. 좀 아저씨 같긴 하지만.”

정선이 옆에서 거들었다.


“......고민 좀 해볼게, 그런데 연희는 사진 보더니 자기 달라는 말 왜 안 해? 별로야?”

나는 말을 돌렸다.


“응? 나 원래 선 같은 거 싫어해.”

연희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갑자기?”


휴대폰 속 흑백사진의 남자는 활짝 웃고 있었다. 가지런한 치아가 흑백의 피부와 대조되어 더욱 빛나 보였다. 괜찮은 남자 같았다.






집에 가는 길, 버스는 마포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창 밖을 보니 한강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너머로 많은 사람들이 한강공원에 있었다. 혼자 있는 사람은 없고 다들 짝이 있었다. 대부분 커플 같아 보였다. 손을 잡고 있었고, 돗자리 위에 누워 서로 얼굴을 보며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재혁이와 했던 한강 데이트가 생각났다. 외롭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휴대폰을 꺼내 앨범을 눌렀다. 재혁이의 사진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아파왔다. 메신저를 열어 메시지를 적었다.


“나 그거 할게. 선”





선을 보는 날, 가장 아끼는 옷인 베이지색 투피스를 입고 문을 나섰다. 멀리 있는 구름까지 보일 정도로 하늘이 무척 맑았다. 바람도 적당히 불며 살갗을 건드렸다. 예감이 좋았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일부러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창문에 비춰지는 사람들의 얼굴이 좋아 보였다. 약속 장소 근처에 이르러 내리려는데 스타킹 올이 나가 있었다. 조금 짜증은 났지만, 아직 약속 시간에 여유가 있어서 화는 나지 않았다.


근처의 편의점에 갔다. 스타킹 코너에서 물건을 고르고 일어났는데, 저 멀리 그가 있었다. 흑백사진 속의 그 남자. 참 착해 보였던 그 남자였다. 그런데 활짝 웃고 있던 그 사진과 다르게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연신 두리번거리던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은 콘돔이었다. 그는 여점원 앞에서 콘돔을 사는 행위가 민망했는지, 고개를 가만히 있지 못했다. 오줌이 마려운 개 마냥 연신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시선은 자신이 산 콘돔이 아닌, 계속 그 여점원의 얼굴에 집중되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뚫어지게 보는 그 눈빛을 느꼈는지, 여점원도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계산이 끝났는데도 쭈뼛쭈뼛 대며 떠나지 않았다. 곧 번호라도 딸 기세였다.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내 존재를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그가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갔다. 편의점 안에서 밖을 보니, 그가 콘돔을 지갑 속에 욱여넣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남자가 지갑 속에 콘돔이라니. 물론 철없이 살 수 있다고 하지만, 아직 나와 첫 만남도 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여점원 앞에서 콘돔을 사며 노골적으로 시선을 두는 것 자체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단전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그는 큰일을 치른 느낌의 표정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휴대폰이 시끄러웠다. 내가 본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그냥 약속 장소를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혜수가 난감해할 까 봐 일단 만나보기로 했다. 내가 뭔가 잘못 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당기시오’라고 적힌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는 사진과 비슷해 보였지만, 어딘가 달랐다. 생각보다 키는 작았고, 어깨는 굽어 있었다. 특히 머리숱이 많이 적었다. 그게 그를 더욱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는 약속시간에 늦은 건 잊은 듯 당당하게 와서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살짝 일어섰다가 인사한 후 바로 앉았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그를 쳐다봤는데, 눈이 무척이나 바빴다. 정확히 말하면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나를 훑고 있었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노골적으로 나를 스캔하고 있었다. 나를 훑어보느라 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단전에서 끓어오르던 무언가가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초면에 죄송한데 우리 나이도 있고 하니, 그냥 바로 말할게요. 사진이랑 다르시네요. 특히 머리 없는 부분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혜수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까지 미쳤다. 고개를 연신 흔들며 걸어갔다. 문에 다다를 즈음 그가 뒤에서 외쳤다.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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