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선"
아저씨, 거기 아저씨,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아니 사장님, 사장님~ 아, 이제야 보시네. 글쎄, 제 말 좀 들어보시라니까요. 취했냐고요? 에이, 술 좀 마셨는데 취한 건 아닙니다. 정신은 멀쩡해요. 왜 이러고 있냐고요? 그냥 인생이 좀 슬퍼서요. 내가 이제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거든요. 예전에는 내가 중심인 줄 알고 살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고, 그래도 뭐라고 하는 사람 하나 없고. 모두가 나를 우러러보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 잘난 거 없긴 합니다. 네, 아버지 덕을 많이 봤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좀 잘 나갔거든요. 대기업 임원도 하시고. 제가 외동아들이라 부족함 없이 다 해주셨어요. 사람이라는 게 배고픔 없이 자라다 보니까, 자꾸 내가 대단한 줄 알게 되더라고요. 이게 내 돈이 아니라 아버지 돈이고, 내가 잘나서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그냥 남들 못 받는 비싼 사교육 받고, 더 좋은 거 먹고, 더 좋은 거 입고 하다 보니 그 덕에 이렇게 된 것뿐인데. 내가 남을 내 아래로 보게 되더라고요. 하대하고, 무시하고. 아마 저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들 많을 겁니다. 그래도 항상 내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어요. 나는 그 이유가 내가 좋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대단한 사람 옆에는 항상 추종자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나는 대단한 사람이니까 그래도 된다고, 상처 줘도 된다고, 스스로 착각의 늪에 빠진 거겠죠. 그게 내가 아니라, 내 돈이 좋아서 그런 건데. 아버지도 퇴직하시고 나도 나이가 어느덧 불혹에 가까워지니까 내가 살아온 인생이 슬프더라고요. 뭐 저도 직장이 있긴 하지만, 예전에 아버지 돈 가져다 쓸 때처럼 그만큼 버는 것도 아니고, 이젠 꼬장을 받아줄 친구들도 없고요. 이 나이에 부모님 집에서 얹혀사는 것도 눈치 보이고, 내 월급으로는 서울에서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살 수 있는 정도이고. 그것 때문에 인생이 슬프냐고요? 아니요. 여자 때문에요.
실은 이틀 전에 선을 봤어요. 그녀가 마음에 들었어요. 걸음걸이부터, 지그시 옷매무새를 다듬는 모습, 살짝 웃는 미소까지도요. 우리는 처음 인사할 때부터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느낌이었어요.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마치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 같은. 전생에 이 사람과 내가 부부관계였거나, 그게 아니라면 서로를 흠모했지만 신분상의 차이로 아니면 뭐 집안의 반대로 이뤄질 수 없어서, 다음 생에 우리 꼭 사랑을 이루자라며 서로 강에 몸을 투신했던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단 말입니다. 이 여자랑은. 나도 그녀에게 호감의 표시를 했죠. 제가 그녀를 계속 쳐다봤거든요. 그윽하게요. 물론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겠지만, 요새 직진남이 대세 아닙니까. 그녀도 나를 좋아하는 눈빛이었고요. 네, 보시다시피 제가 외모가 좀 되지 않습니까? 솔직히 살 좀 쪘지만, 봐줄 만하잖아요. 요새 뭐 기생오라비 같은 스타일보다 나 같이, 좀 남자답게 생긴 상이 더 낫지 않나요? 하정우 좀 닮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에이, 아저씨 어디 가세요. 죄송해요. 이제 그런 말 안 할게요. 아무튼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아저씨. 그런데 그 여자가 더구나 한의사였어요. 한의사. 장인어른도 한의사시고요. 외모, 직업, 집안까지 삼 박자가 고루 조화를 이룬 최상위급 여자가 내 앞에 있었고, 그녀가 나와 인생의 마라톤을 함께할 상대로 나왔다 이 말입니다. 인생에 놓치지 말아야 할 몇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왠지 그 기회가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들뜬 마음으로 우리의 첫 대화를 시작해보려고 했어요. 왠지 대화까지 잘 통할 것 같았거든요. 정말 그녀와 결혼까지 하는 모습이 상상되더라고요, 애는 몇 명 낳을까, 신혼집은 어디 동네에서 시작해야 하나까지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녀가 매서운 눈매로 일별 하고는 상처가 되는 말을 툭 내뱉고 그대로 나가버리는 겁니다. 좀 어이가 없었어요. 지는 얼마나 잘났길래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예의 없이 구는가 이 말입니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상처 주는 말이 뭐였냐고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내 운명의 상대가 지금 떠나갔는데. 저 원래 수동적인 사람이라 표현 같은 것 잘 못합니다. 그래도 이번에 놓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연락하겠습니다!라고 뒤통수에 외쳤죠. 그래도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요. 후회스럽더라고요. 그렇게 오만한 여자한테 지질하게 뒤통수에 소리친 나 자신이요. 그냥 쿨하게 넘겼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아니면 욕이라도 한 바가지 던져줄 걸 그랬어요.
집에 갔는데, 엄마가 내게 묻는 겁니다. 선이 잘돼서 이렇게 늦게 온 거냐고. 얼마나 즐거운 시간이었길래 둘이 술까지 먹고 왔냐고요. 엄마의 표정은 심히 밝았습니다. 엄마가 이 선 자리를 구하기 위해 꽤나 노력했다고 들었어요. 며칠 전부터 계속 얘기하셨거든요. 엄마도 아마 엄청 기대했을 거예요. 저도 그만큼 노력하려고 했는데, 그 여자가 그럴 기회도 안 줬다는 게 정말 열 받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어머니에게 솔직히 말했어요. 혼자 술 먹고 왔다고. 그 여자가 그냥 가버려서. 내가 못나서. 그러곤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문도 잠가버렸어요. 잔소리를 듣기 싫었거든요. 엄마가 문고리를 여러 번 돌리시더니, 한숨을 푹 쉬고 방으로 들어가시더라고요. 속상했습니다. 그 여자도 미웠고요. 그런데 더 미운 건 그 여자가 계속 생각나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의 없이 나가버린 여자를요. 저 정말 바보 같죠? 압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걸까요? 계속 한숨만 푹푹 쉬었습니다. 그 여자가 그렇게 나가버린 이유를 자꾸 찾게 되더라고요. 아직 얘기도 나누기 전이니까, 아마 내 첫인상 때문이겠죠. 그 여자 말대로라면 아마 머리 때문일 겁니다. 네, 저 탈모가 좀 왔거든요. 컴퓨터를 켜고 탈모 약이나 모발이식 수술을 찾아보았습니다. 한숨이 계속 나오더군요. 내가 어느새 이렇게 되었나,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하고요. 내 눈에는 괜찮았는데 말이죠. 탈모는 대부분 유전이라던데, 아버지는 아직 머리가 풍성하시거든요. 그럼 내 조상 중에 누가 문제 인가하고 원망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 방 밑에 쪽지가 쓱 들어오더라고요. 엄마였습니다.
아들아, 오늘 속상한 일이 있더라도 너 스스로를 책망하지 말거라.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야. 여자는 세상에 반이지만, 너는 오직 하나란다.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단다.
눈물이 나더군요. 왜 나는 남 탓만 하고 살아왔나 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에게 연락해야겠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기가 아닙니다. 그냥 여러 감정이 들더라고요. 다시 잘 될 확률은 어차피 낮을 것 같아서,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적은 장문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거 보세요. 그런데 아저씨 무릎이 왜 이렇게 차갑고 딱딱해요. 아, 돌덩어리였네.
안녕하세요. 저를 차단하셨을 수도 있지만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그렇게 예의 없이 나간 이유가 당신이 말한 대로 제 외모뿐이었다면 당신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는 점을 반드시 인지하셨으면 합니다. 사전에 저는 당신의 사진을 보지 못 했고, 당신은 저의 사진을 보고 성사된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박차고 나갈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저인 게 더 맞습니다. 당신은 외모만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수준으로 감히 선 자리에 나왔고, 당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당신의 수준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고 당신이 생각납니다. 당신의 오만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마음에 든 나 자신이 불쌍합니다. 그런 감정이 들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그 거절은, 내게 체계적인 피해를 줬단 말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오기 전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기분이 안 좋은 상황이 있었다면 이해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제게 사과하세요. 저는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 사과하지 않으시겠죠.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당신이 그 후에 만나는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