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선"
“지질한 새끼.”
문자를 보여주자 마자 정선은 그렇게 내뱉었다. 정선이 흥분한 듯 말을 이었다.
“선도 보기 전에 콘돔이나 사는 놈이 무슨 논리적인 척 문자를 보냈네. 아무리 준비성이 좋다고 하지만 자기 수준 생각 않고 역사를 바로 만들려고 하는 놈이 정상인가? 선이라는 게 말이야. 일단 진정성이 있어야 하잖아? 미래에 대한 진정성. 결혼을 전제로 한 거시적인 관점의 만남. 아무리 남녀가 만나 바로 불타오를 수 있다고 하지만, 선이라는 신성한 자리에서 그런 성욕은 좀 참던지, 집에서 해결하고 오던지 말이야. 하물며 콘돔 사는 그 자리에서 알바생 보며 헥헥 대는 변태 새끼가 무슨 정상인 코스프레냐 이거지. 특히 이 부분이 가관이야. 네가 체계적인 피해를 줬대. 그날 네 심정은 생각지도 않고 말이야. 선 자리 가기 전에 발정 난 남자의 현장을 마주하고, 자신을 성적인 상대로 쳐다보는 남자 때문에 하루를 망친 그날의 심정을 말이지."
“선도 안 해본 얘가 왜 이렇게 흥분해? 그래도 문자 내용이 꽤 날카롭지 않아?”
혜수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날카롭긴 개뿔. 내가 이런 놈 만났으면 얼굴에 시원하게 물 한번 뿌리고 침 뱉고 나왔을 거야.”
“케이크에 그만 침 튀겨. 그 이후로 연락 안 와?”
연희가 흥분하는 정선의 입을 가리며 말했다.
“몇 번 전화 왔는데 씹었어. 처음에는 기분이 나빴는데, 계속 생각해보니 내가 첫 만남에서 그렇게 말하고 박차고 나온 건 좀 미안한 기분이 들더라. 솔직히 그 사람 탈모가 자기가 오고 싶어서 왔겠냐고. 그냥 살아가다 보니 잦은 스트레스와 환경 호르몬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그게 아니면 굳건한 유전자의 희생양이거나.”
"또 아니면 정열적인 욕망의 사나이 거나. 대머리가 원래 성욕이 세다고 하잖아.”
정선이 말했다. 다들 웃었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냥 안 만나려고, 아니면 아닌 거지. 몇 번은 모르는 번호로 전화도 오더라고. 지질한 걸 넘어서 집착하기 시작한 걸까? 꼭 사과를 받아내야겠다는 그 오기가 어느 순간 좀 무서워지더라고.”
“너한테 빠지긴 했나 보다. 그 정도로 거절당하고 무시당했는데도 그렇게 전화하는 거면 대단하지 않아? 요새 희귀한 직진남이네.”
혜수가 말했다.
“원래 나이 든 남자들이 뜬금없이 오기가 있다니까. 오기란 말도 사치인 아집이라 할 수 있지. 어느 순간 그게 목적이 돼버린 거라니까. 그냥 널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게 아니라, 너한테 사과를 받음으로 인해 자신이 승자라고 생각하는 자기 합리화. 이런 상황에서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정신 승리하고자 하는 그런 지질한 영혼들. 어때? 넌 그 지질한 영혼을 보듬어 줄거니? 아니면 그냥 패자로 가만히 있을 거야?”
정선이 손가락을 흔들며 내게 말했다.
“쓸데없는 도발은. 무시가 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아. 피곤하고 시간 아까워.”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전화받아봐, 우리랑 있을 때 바로 대응할 수 있잖아.”
“에이, 뭘 받아.”
“그냥 받아보라니까. 내가 받아볼게”
정선이 휴대폰을 채갔다.
“여보세요! 아, 잠시만요.”
정선이 입모양으로 ‘회사’라고 말하며 내게 휴대폰을 건넸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왜 전화를 계속 안 받아요? 곧 프로젝트 마감인 거 몰라요?”
전화기 속 차장의 목소리가 따갑다.
“차장님, 오늘 일요일인데요?”
“일 하루 이틀 해? 광고주가 쉬면 우리도 같이 쉬는 건가? 제정신이야? 전화는 왜 안 받았어요?”
“죄송해요, 받기 껄끄러운 전화가 있어서요. 문자라도 좀 주시지.....”
“문자요? 내가 지금 남의 사정 봐가면서 일해야 합니까? 책임감이 없어도 이렇게 없나? 광고주한테 고개 숙여가며 영업해서 겨우 입찰 따왔는데, 디자인에서 이렇게 지연시키면 지금 몇 명이 피해 보는지 알아요? 기획서 보낸 지 지금 이틀이나 됐는데, 뭐 하는 겁니까? 우리 일 별거 없어 보여요? 짜쳐요? 그럼 때려치우던가. 지금 당신 말고 일 하려는 사람이 줄 섰습니다. 일 하기 싫으면 지금 말해요, 내가 손수 팀장이랑 인사부에 전달할 테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바로 확인해서, 오늘까지 보낼게요.”
“그래요. 정신 차립시다. 내가 다 그쪽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전화는 뚝 끊겼다.
“또 그 차장이야?”
옆에서 연희가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 차장 또 성깔 부리네. 핵 빡쳐. 지가 일 똑바로 하던가. 디자인 컨펌 날짜 미리 알려주던가. 하, 가만히 있다가 지랄한다니까. 자기만 주말에 일하니까 빡친거지. 이거 봐 금요일 밤에 메일 보내 놓고, 나한테 기획서 왜 안보냬? 아니 지금 1970년대 인가? 이렇게 노동자의 인권을 무시해도 되는 건가. 진짜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신고할까.”
“너 곧 연봉 협상한다며. 이번꺼 따야 실적 채우고 인센티브 받는다며. 그럼 열심히 해야지”
혜수가 말했다. 이럴 때마다 바른말만 하는 혜수의 낯짝이 보기 싫었다.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나 먼저 갈게 얘들아. 아참, 혜수야, 커피 잘 먹었어.”
카피는 형편없었다. 카피라이터까지 맡고 있는 차장의 수준은 늘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쓸데없는 단어를 열거하고는 갑자기 감성적인 말로 급하게 마무리하는 하는 형태. 대구법이나 은유법 등의 장치는 찾아볼 수 없었고, 심플함을 넘어 심심하기까지 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 실력으로 차장까지 승진했다고 하니, 우리 회사와 팀장의 안목이 꽤 의심스러웠다. 내 수준 높은 미적 감각을 이런 저급한 카피와 함께 놓아야 한다니. 아무리 작은 광고대행사라고 하더라도 수준이 너무한 거 아닌가. 광고주도 이따위 카피를 오케이 했다고 하니, 그쪽 수준도 알만했다. 나도 대충 해도 될 것 같았다. 카피의 폰트를 유행하는 폰트에 맞춰 여러 번 수정해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충 디자인의 윤곽을 완료하고 나자 일할 맛이 뚝 떨어졌다. 유튜브를 보고, 온라인 쇼핑몰도 몇 번 뒤졌지만, 구미를 당길 만한 것은 없었다. 인스타그램을 켰다. 연희가 낮에 찍었던 커피 사진을 올린 것에 ‘하트’를 눌렀다. 밑으로 스크롤을 하자, 대학 동기가 호텔 방에서 파티를 한 사진이 보였다. 벽에는 BRIDAL SHOWER라는 모양의 풍선이 붙여져 있었고, 다들 레이스가 달린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이어트를 심하게 했는지, 아니면 결혼 전에 과하게 얼굴에 손을 댔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포토샵의 힘을 빌렸든지 내가 아는 얼굴과 몸매가 아니었다. 댓글 란에 축하해, 얼굴이 많이 변했네?라고 적었다가 지웠다. ‘하트’를 누르려다가 그냥 무시하고 스크롤을 하니, 또 마음에 들지 않는 피드가 나왔다. 창문 너머로 한강의 야경이 펼쳐진 레스토랑이었다. 사진의 배경은 전체적으로 어두웠지만, 테이블 위 반지는 환한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아마 휴대폰 플래시로 비추는 거겠지. 그 옆에는 디저트가 담긴 접시에 소스로 글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will you marry me? 음식 접시에 글자를 넣는 건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다. 형편없는 프러포즈 사진 피드의 하단에는 “Yes!!”와 조악한 웃는 이모티콘들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댓글에는 다들 호들갑을 떨며 축하를 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뒤집어 덮으려다가, 재혁의 아이디를 검색했다. 비공개로 전환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혹시나 헤어진 것 일까.
재혁과 계속 사귀었다면 나도 저 인스타그램 속 피드의 주인공처럼, 프러포즈를 받았거나, 친구들과 웨딩 파티를 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재혁은 미래가 불투명했다. 말도 안 되는 음악에 빠져 나이만 차고 있었다. 재혁은 항상 친구들 중 가장 재능 있는 사람은 자기였고, 모두들 자신의 천재성을 부러워했었다고 열을 다해 떠들어 댔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재혁은 재능이 없었다. 재혁이 내게 열심히 떠들며 자신의 음악적 천재성을 계속 어필했던 이유는 당위성 때문으로 밖에 안보였다. 자신의 성공에 투자하는 거라며 돈을 매번 빌려가는 그 당위성. 그를 위해 적금까지 깨야만 했을 때, 나는 다른 예술 하는 친구들처럼 너도 경제 활동을 해야 한다며 아르바이트를 얻어다 줬다. 그때 그는 오히려 자신의 음악을 무시하느냐고, 너도 내 음악을 인정하지 못하고 대중성에 빠진 전형적인 소시민이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를 보며, 나는 자주 입을 다물었다.
디자인 컨펌 요청 메일을 보내고, 커피잔을 헹구기 위해 일어났을 때 전화기가 울렸다. 차장인가. 휴대폰을 들어보니, ‘변태 새끼’라고 적혀있었다. 선 남이었다. 전화기를 다시 덮었다. 끈질긴 놈, 이제 그만 좀 하지. 긴 전화 진동이 멈추고, 작고 짧은 진동이 울렸다. 문자 진동이었다. 지난번 문자처럼 또 뭘 사과하라고 할까, 친구들과 공유할 에피소드를 자주 만들어주는 남자에게 일종의 감사함까지 느껴졌다. 휴대폰을 들어보니 그 남자가 아니었다. 차장이었다. 갑작스러운 두통이 머리를 덮쳤다.
- 광고주한테 연락 왔어요. 디자인 수정일까지 감안하면 기존 릴리즈 일정에 맞추지 못할 것 같다고. 그러니까 그쪽 때문에 다 엎어지기 직전이란 겁니다.’
“아...... 시발”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문자도 보냈다. 메일 확인해보시라고. 하지만 어떤 답장도 오지 않았고, 보낸 메일함의 수신 확인 화면에서도 차장은 메일을 읽지 않고 있었다. 손톱을 깨물며 그에게 전화를 재차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차장은 자신이 기획서 마감일을 지키지 않았고, 결국 지연돼버린 광고 일정을 내 책임으로 돌리려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엔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도 받지 않았다. 일요일 밤이라 아무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속절없이 내가 그 책임을 질 것 같았고, 곧 있을 연봉협상에서 동결도 감사하거니와, 오히려 이 조직에서 그리고 이 업계에서 내 이름에 낙인이 찍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전화기가 울려 급하게 받았다.
“여보세요. 제가 디자인 일정에 맞추지 못한 건 죄송한데요. 기획서를 금요일 밤에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나야. 재혁이.”
“어?....... 재혁이구나. 웬일이야? 아니 이걸 물어볼게 아니라, 내가 지금 급히 받아야 할 전화가 있어서.”
“잠깐 볼 수 있을까? 지금 집 앞이야.”
“지금? 무슨 일인데?”
“실은 아빠가 돌아가셨어”
재혁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나는 급하게 겉옷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