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선"
가끔은 그런 만남이 있다. 상대방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음에 들어오는 소개팅이나 선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꾸역꾸역 만나야만 하는 자리. 보통 처음에 받은 상대방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사는 곳이 달라 장거리 만남이 되거나, 종교적인 차이 등으로 만남을 거절하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하지만 나는 쉽게 거절을 할 수 없었다. 특히 내게 만남을 가장 자주 시켜주는 주선자인 범중에게는 충성을 마지않았다. 과거에 내가 그에게 준 한 번의 거절은 장기간의 기회 박탈을 의미했었고, 나는 그에게 다시 어필하기 위해 많은 자원을 소모했어야만 했다. 내가 여자가 생겼다고 오해하거나, 여자가 귀한 줄 모르는 일종의 ‘배부른 놈’이라고 인식이 되면 추가 주선은 끝이었다. 특히 많은 매물-소개팅 건수를 보유한 범중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그의 모든 소개팅 제안은 묻고 따지지 않는 태도와 언제든 오케이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어미의 입에서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부단히 입을 벌리는 아기새처럼 나는 범중에게 항상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입에서 ‘소개팅’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나는 “당연하지”라고 외친 경우도 있었다. 알고 보니 예전 자기 소개팅 얘기에 내가 그렇게 흥분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범중에게 점수를 따서 내심 기분이 좋았었다. 나는 벤치 내 대기 타자로서 그에게 인식되어야 했다. 이러한 자발적인 강압성은 다음의 도약을 위해 무릎을 숙이는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날의 만남이 그랬다. 지난 선에서 무참히 까이고 문자마저 답장이 없자, 나는 친구들과 잦은 술자리를 가졌다. 지속되는 하소연에 질린 범중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나도 딱히 소개팅녀의 프로필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 머릿속을 환기시키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소개팅을 받게 되었다. 실제로 만났을 때는 그래도 사진보다 나은 사람이 나와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지난번의 선녀(선을 본 여자)가 자꾸 생각나서 내 앞의 여자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졌다. 아마 이번에도 안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소개팅의 성공률은 항상 낮다.
이렇게 내 앞의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정신 승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당위성, 즉 이 만남의 목적을 부여해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평소에 혼자 가지 못하는 식당에 가보기 위해 이 소개팅을 이용했다. 즉, 소개팅을 빙자한 맛집 탐방 목적의 만남이다. 우리는 인도식당에서 만났는데, 그녀도 나와 같은 입장인지 난을 뜯는 행태가 만만치 않았다. 동물의 왕국에서 불곰이 자기 새끼를 위협하는 늑대를 찢어발기듯이, 버터가 묻은 난은 무자비하게 찢겨 나갔다. 앞에 내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녀는 커리를 넉넉히 묻히더니 단숨에 입에 넣으며 다음 목표인 탄두리 치킨에 손이 가고 있었다. 나는 연신 감탄하며 그 먹방을 말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오히려 그녀가 이 만남의 무용을 더욱 어필하는 것 같아 내가 미안한 감정까지 들었다. 어차피 서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거, 여자의 입장이나 들어보자 하여 그날의 만남에 대한 전말을 전했다.
“제가 최근에 선을 봤는데요. 소개팅 말고, 좀 진중한 만남의 선. 거기서 제가 운명의 여자를 만났다고 생각했거든요. 한번 들어보실래요? 생각보다 재미있을 거예요.”
실제로 내 앞의 여자는 그 짧은 얘기를 생각보다 재미있어했다. 내 기준에는 안타까운 얘기였지만, 그녀에게는 딱 커리를 먹을 때 들을 만한 킬링타임용 얘기였던 것 같다. 특히, 선 자리에서 여자가 남기고 간 마지막 멘트에서 내 앞의 소개팅녀는 풉 하고 터졌고, 연이어 고개를 움직이며 아, 죄송해요 라고 말했다. 그때 그녀의 머리에 커리가 묻어있었는데 나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제가 굳이 여기서 막 연민 느낄 필요는 없죠?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그쪽 머리. 제가 아는 병원 있는데 소개해드릴까요? 회사 옆자리 과장님이 그 병원 다니고 많이 좋아지셨거든요.”
이미 병원이란 병원은 많이 다녀봤고, 약도 먹고 있는 상태라 그저 웃어넘겼다. 탈모약 때문에 생긴다는 부작용, 성욕의 감퇴나 성기능의 저하에 대해 걱정이 될 뿐이었다. 사실 말 그대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쪽 너무 운명론자 아니에요? 선이나 소개팅 같은 인위적인 만남에서 운명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냥 자기가 외로울 때 딱 적절한 여성이 나타나서 끌리다 보니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그거 착각이에요. 그쪽 너무 금사빠 아니에요? 아, 나한테 빠진 건 아닌가 보다. 그랬다면 제 앞에서 다른 선에서 만난 여자 얘기는 안 할 테니까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타까워하는 것일까? 그녀가 혹시나 내게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글쎄요. 소개팅 같이 누가 개입해서 만남을 성사해주는 게 무조건 인위적인 거다 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만남의 자연스러움과 인위적임은 내 앞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다른 거 아닐까요? 내 앞의 여자가 자연스럽게 운명으로 다가온 걸 수도 있잖아요. 머리에 커리 묻었어요. 아니, 아니 거기. 제가 닦아드릴게요.”
나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그녀가 내 친절에 미소 짓고 있었다. 나 정말 금세 사랑에 빠지는 금사빠인 걸까. 머리카락을 다 닦은 손을 바로 치우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가 다시 음식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한테 반하면 안 돼요. 저 그쪽 관심 없어요.”
그렇구나. 내가 금사빠인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상대방의 의사가 중요했다. 소개팅이든 선이든 나만의 감정이 우선이 아니었지. 통하는 게 중요했다. 그게 무엇이든. 나는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
“거기 전화 오는데요.”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상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지난번 선에 나왔던 한의사예요.”
나는 그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 자리를 이탈했다. 그녀가 내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렇게도 연락이 없던 그녀가 지금 이 타이밍에 내게 전화를 하다니. 이게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가 고마웠다. 내가 금사빠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증명해준 느낌이 들었다. 사실 방금 소개팅녀에게 조금이나마 호감을 느낄 뻔했지만, 그녀의 전화는 나를 소개팅녀에게서 지켜주었다. 이제 내 진심을 알아주었다는 신호임에 틀림없었다.
내일 저녁을 함께하자는 그녀에게 나는 한 번의 튕김을 주기 위해 “무슨 일 있으신가요?”라고 물었지만, 전화기 속 여자는 자기 할 말만 한 채 전화를 뚝 끊었다. 나는 그래도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자리에 돌아왔는데, 소개팅녀가 어느새 자리를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저녁만 먹고 바로 가시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분위기 자체가 너무도 뜨뜻미지근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계산대로 가기에 나도 빠르게 겉옷을 들고 그녀에게 갔다. 내가 계산을 하려고 했으나, 그녀가 재차 말리며 자신이 계산했다. 우리는 가게 밖에서 서로 마주 섰다.
“첫 만남이라 제가 사려고 했는데요. 이런 건 남자가 사야죠.”
“아니요. 다음에 얻어먹을 생각이 없어서 제가 샀어요. 그리고 남자가 사고 여자가 사고 이런 게 어딨어요. 주선자한테는 잘 말해 둘게요. 걱정 마세요. 아 참,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그쪽 모태솔로 아니죠?”
“네? 모태솔로요? 에이, 당연히 아니죠. 나이가 곧 마흔인데요.”
“그렇겠죠? 그런데 모태솔로 같아 보여요. 하는 짓이나 표정이요. 특히 그 눈이.”
“제 눈이요?”
“네. 얼굴의 모든 부위는 수술로 다 고칠 수 있지만, 눈빛은 못 고친다고 하잖아요. 그쪽 눈은 좀 뭔가, 음흉하다고 해야 하나. 또 너무 저를 훑어봐요. 특히 가슴을 너무 노골적으로 본다고 해야 하나.”
“아......”
무의식적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뒤에서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었구나. 그래서 그때 그녀가 불쾌했었구나. 아니다. 생각해보니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만났던 많은 여자들이 내게 그런 신호를 보냈던 것 같다. 나도 어느새 노골적으로 여자를 보는 남자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여성의 다리나 신체부위를 노골적으로 보는 아저씨들을 얼마나 경멸해 왔던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있던 것이다. 누굴 탓할게 아니었다. 사과를 하려고 고개를 들었지만, 소개팅녀는 어느새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