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봤습니다 - (6화) 여자의 시선

단편소설 "선"

by 날갯짓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는 재혁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나는 그저 그를 안아주었다. 그는 내 품에 안겨 잠시 시간을 보냈다. 뒤를 보니 검은 봉지 속에 맥주가 담겨 있었다. 우리는 잠시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술을 나눴다. 아버지에 대해 물었으나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는지, 어제 또는 오늘 돌아가셨다면 네가 지금 여기에 있을 여유가 있는지, 어서 같이 장례식장에 가봐야 하는 건 아닌지, 그것도 아니고 예전에 돌아가셨다면 왜 미리 알리지 않았는지, 우리가 이미 남이 된 상황에서 알리기도 우스웠다면, 지금 여기에 왜 온 건지. 하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내 질문들은 담배 연기처럼 허공으로 자꾸만 사라져 갔다. 답답했다. 나는 결국 이 물음에 이르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 여자랑 헤어졌어?”

“...... 응. 미안.”

“뭐가 미안해?”

“아니, 너에게 상처 준 것 같아서. 결국 너였는데. 내가 잠시 미쳐있던 것 같아.”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야. 그냥 우리가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그래도 미안해. 자꾸 생각나더라.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도, 같이 인천 갔던 것도. 네가 좋아하는 찰옥수수도, 우리 같이 나눠먹던 붕어빵도.

재혁이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가슴에 깊이 내려앉았다. 큰일이다. 재혁이와 함께 했던 추억이 생각나고 있었다. 그와 웃고 울고 아끼고 싸우고 사랑했던 기억이 가랑눈처럼 내 마음에 여기저기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그만해. 너 알아? 너 쓰레기야.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아. 싸우고 울고 지치고 힘들고, 넌 너보다 어린 여자가 잘 어울려.”

“무슨 소리야. 난 네 앞에서만 온전히 나일 수 있었어.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때 우리 좋았잖아.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나 진짜 달라졌어. 진짜 이번엔 달라.”

“아니. 나 이제 그 유치했던 시절로 돌아가기 싫어. 나 이미 노처녀야. 난 안정적인 사람 만나서 결혼할 거라고. 너 아직도 그 음악 하지? 나 솔직히 너 음악 이해 못해.”
내 말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직도 그의 음악은 그의 자존심일까.

“나 곧 데뷔할 것 같아. 나 이번에 소속사 들어갔잖아. 곡은 다 완성했는데, 아직 조율 중이야. 솔직히 말하면 너와의 추억을 노래로 만들었어.”

그가 휴대폰을 꺼내더니, 음악을 들려줬다. 강한 비트와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음악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느낌이 들 정도로 대중적인 리듬이었다. 항상 매니악한 노래만 만들던 재혁이 이렇게 변하다니. 이번엔 뭔가 달라 보였다.

“가사도 이미 썼는데, 회사에 보조 작사가가 있어서 같이 수정 중이야. 후렴만 알려줄까? 아직도 너를 만났던 날이 생생해.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기억에서 추억으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이뤄질 우리의 사랑. 어때?”

가사가 쏙쏙 들어왔다. 그의 마음의 간절함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내 외로움의 성이 견고하지 못한 까닭일까. 그동안 쌓아왔던 미움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저 가사처럼, 우리의 과거는 기억에서 추억으로,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진솔한 눈빛에 나는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오, 웃었다. 아냐, 웃었어. 내가 봤어.”
그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나는 몇 번의 저항을 했지만, 결국 멈추고 말았다.

“아냐. 너 근데 진짜 헤어진 거 맞지?”

“응, 근데, 음...... 미리 말할게, 솔직히 정리했는데 자꾸 연락이 오긴 해.”

“뭐야, 그럼 헤어진건 아닌 거 아냐?”

“아냐. 난 이미 마음이 떠났고 차단도 했어”

“확실한 거지? 잠깐만, 너희 아버님 얘기해야지. 어떻게 된 거야?”

“일단 좀 추운데, 집 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

우리는 일어났고 내 집 앞의 편의점에 들렀다. 그는 담배를 피운다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맥주 두 병과 과자를 샀다. 그가 밖에서 콘돔도 사야 한다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저 놈은 오늘 화해하자마자 바로 할 생각인가. 아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잠시 떨어졌을 뿐 오래된 연인이다. 나도 그가 그리웠다. 나는 콘돔도 함께 계산했다.

“헤헷, 잘 먹을게.”
그가 봉지 안의 술과 안주를 보며 말했다. 그가 내 팔짱을 꼈다. 나는 손으로 팔짱을 풀고, 그의 손을 잡았다. 오랜 기간 잡아왔고, 또 오랫동안 놓아왔던 이 손. 따뜻했던 재혁이의 손. 생각보다 매끄러웠다.

“어? 굳은살 없어졌네?

“무슨 굳은살?”

“너 손가락에 기타 열심히 쳐서 생겼던 굳은살 있었잖아. 요새 기타 잘 안쳐?”

“아, 회사 들어가고 나서 피아노로 바꿨어. 이제 보컬에 집중해야 하더라고.”

“그렇구나. 보컬 레슨 같은 것도 받겠네.”

“그렇지. 나름 체계적이야. 회사에서 나에게 투자를 많이 하더라고.”

체계적이라는 단어에 그 남자가 생각났다. 자신에게 체계적인 피해를 줬다는 그 남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까 편의점에서 머뭇거리며 콘돔을 샀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나도 그놈과 똑같이 콘돔을 샀다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그래도 난 그와 달랐다. 나는 이제 안정적인 진짜 사랑을 할 거니까. 그저 한 번의 호기심이 아닌, 미래를 약속한 사랑. 우리가 손을 잡고 발맞춰 걸어가는 이 상황처럼 나는 미래에 가수 남편의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걸을 것이다. 그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굳은살이 사라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아쉬웠다. 그의 굳은 살은 그의 열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유일한 의미였으니까. 그건 내가 좋아했던 그의 예전 모습이었다.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깨끗하게 청소하지 못한 집이 창피해, 잠시 그를 밖에 세워두었다. 그는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왔고, 나에게 입을 맞췄다. 나는 술, 술은 이라고 물었지만 그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입을 계속 맞췄다. 잠시 술냄새가 났고 조금 비틀거렸다. 이리저리 움직이다 컴퓨터 키보드에 손이 닿았고, 다닥 거리는 소리에 회사 일이 생각났다. 어차피 오늘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바가 없었고, 나는 그저 눈을 감았다. 그가 나를 감싸 안았다. 그래. 이 따뜻함. 오랜만의 온기와 그의 냄새가 예전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이 와중에도 아버지 일을 묻고 싶었지만, 자꾸만 침묵하고 있는 그에게도 사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슬픈 자에게 자꾸 슬픈 일을 들먹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먼 동이 터 오르고 있었고 나는 살짝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지샌달이 보였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잠든 얼굴을 보면서, 곧 있을 출근을 염려했고,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했고, 우리의 미래를 걱정했다. 창문에서 흘러 들어오는 한기에 그가 잠시 눈을 지그시 떴다.

“안 자?”

“잠이 안 오네, 그 아버님...... 장례식은 언제 했어?”

“....... 얼마 안 됐어. 그런데 장례식에서...... 아, 아니다.”

“왜, 왜? 장례식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건 아니고. 실은 나 회사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래서 가불이 안되더라고. 어쩔 수 없이 장례비는 대출받긴 했지.”

“대출? 얼마나?”

“장례비에다가, 추가로 연습비랑 생활비랑 이것저것 해서 이천만 원.”

“그렇게 해주는 데가 있어? 너 신용 등급 안됐잖아.”

“응. 어쩔 수 없잖아. 이자 센 데서 빌렸지. 빨리 갚도록 노력해 봐야지.”

“아..... 그렇구나. 힘들겠다.”

“혹시...... 진짜 미안한데, 아, 아니다.”
나는 그가 숨기는 말이 무엇인 지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왜, 말해봐. 돈 필요해?”

“아니, 내가 너한테 어떻게 빌려. 이러면 내가 쓰레기 같잖아.”

“너 쓰레기 맞잖아. 나한테 쓰레기 짓 했잖아.”

“에이, 그래도.”
그가 웃으며 나를 안았다. 나는 그의 품에서 입을 열었다.

“나도 요새 좀 힘들긴 한데, 알아볼게.”

“응? 꼭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고마워. 사랑해.”

“나도.”

“응, 힘들면 안 해줘도 괜찮아. 근데 혜수 누나 아직도 한의원 잘 다녀?”

“응. 잘 다니지. 아.”

그렇구나. 혜수에게 이천만 원은 그렇게 큰돈이 아니었다. 혜수는 친구들 중에 가장 금수저였다. 혜수라면 나에게 그 정도는 빌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베프니까. 가장 친한 친구를 말하라고 하면 나는 혜수, 정선, 연희라고 말할 수 있었다. 특히 혜수는 가끔 얄밉긴 했지만 그녀는 내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나는 혜수에게 바로 연락하려다가, 지금 시간을 깨닫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야?”

“회사, 팀장이 출근하자마자 회의실로 오래.”

“요새 일 많나 봐? 바쁘네.”

그가 나른한 듯 나를 더욱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는 그 품을 풀고 일어났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차장은 이미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고 있으니, 나도 그에 맞춰 준비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그간 차장이 썼던 기획서와 카피를 검토했다. 또 내가 제작한 디자인, 프로젝트 기여도 등을 문서로 작성했다. 그간 당하기만 했지만, 나도 몸부림칠 시기였다.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는 데 재혁이가 내게 커피를 갖다 줬다. 난 그의 팔을 잡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힘이 샘솟았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나는 팀장에게 달려가 차장의 만행을 알렸다. 차장도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지 않았다. 차장은 어제 있던 일뿐만 아니라, 기존에 있었던 디자인 수정에 따른 프로젝트 지연, 더 나아가 나의 인성, 나태함에 대해 알렸다. 옹졸해 보이는 그의 입에선 침이 쉴 새 없이 튀겼다. 팀장도 난처한 표정이었다. 보통의 나였다면 팀장의 표정을 보고 그저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그 날은 그럴 수 없었다. 내겐 미래가 걸려 있었다. 재혁을 생각하자 신기하게도 힘이 났다. 나는 가방에서 새벽에 만든 자료를 꺼냈다. 타 광고 프로젝트 작업 분할 구조에서 각 작업에 할애되는 평균 시간과 우리 팀의 차이를 비교했다. 즉, 차장이 평소 기획서 시간을 맞추지 못하여 디자인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어필했다. 그리고 차장의 기획서 작성의 미흡함과 허접한 카피 능력까지 근거로 제시했다. 더 나아가 이번 프로젝트에 더 어울리는 카피를 여러 안 제시하며 비주얼뿐만 아니라 카피도 내가 더 낫다는 것을 어필했다. 팀장도 나의 노력에 놀란 표정이었다. 차장은 내가 논리적으로 자료까지 준비한 것에 흥분했는지, 아니면 자기보다 나은 카피 실력에 짜증이 났는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나는 차장의 뒤통수에 결국 술만 먹으며 영업하는 거 외에 하는 게 뭐냐고 비난을 내뱉었다.

“팀장님, 어떡하실 거예요. 차장은 결국 저한테 책임 다 돌리고, 자기만 쏙 빠지려는 거 아닌가요. 지난번에 퇴사한 지연 씨도 차장님 잘못 뒤집어쓴 거잖아요. 왜 차장님만 계속 보듬어주세요. 저도 술 먹을 수 있어요. 저도 영업할 수 있어요. 저도 기획서 쓸 수 있다고요. 계속 이렇게 되면 다 차장님 때문에 나갈 거예요. 진짜!”

“일단 진정해봐요. 이러다가 팀 분위기 너무 나빠지겠어.”

“이미 나빠졌어요. 이번 프로젝트뿐만이 아니라 차장님 때문에 진짜 다들 힘들어해요. 팀장님보다 연차 높다고 팀장님 무시하는 건지, 자기가 팀장처럼 다 지시하는데, 저는 누구 지시를 따라야 하는 건가요?”

“아, 그랬어요? 흐음. 일단 내가 고민 좀 해볼게요. 그래도 광고주들이 차장 같은 스타일을 좋아해서, 남자라서 편하기도 하고.”

“아니, 요즘 시대에 남자라서 편하고, 여자라서 불편하다니. 무슨 아직도 영업을 술로 해요. 룸살롱 같은 데 가는 거 아니잖아요. 우리 회사 그런 회사 아니잖아요. 팀장님 능력이면 그런 술 안 먹어도 되잖아요.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일단 목소리 좀 낮춰요. 너무 강경하니까 내가 할 말이 없긴 하네. 고민 좀 해볼게요.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솔직히 이번에 안 되는 게 디자인 기간이랑은 크게 관련이 없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역시 그랬다. 한주 미뤄졌다고, 프로젝트가 무너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마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차장의 새치 혀에 당할 뻔했다. 팀장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일단 두 분이 우리 팀 안에 같이 있을 수 있겠어요? 화해하거나, 진짜 못 참겠으면 제가 다른 팀으로 옮겨 줄게요. 어쨌든 우리 팀 영업이 차장님 손에 좀 많이 달려 있긴 해서. 아시는 분도 많고. 윗분들도 좋아하고.”

“제가 새로 프로젝트 따올게요. 그러면 저 말고 차장님 옮겨주세요. 진짜 제가 이번에 보여드릴게요.”

“음...... 할 수 있겠어요?”

“네!”

나는 자리로 돌아가며 혜수에게 연락했다. 혜수에겐 돈도 있었고, 한의원도 있었고, 광고를 넣을만한 인맥도 있었다. 혜수가 나의 구세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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