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봤습니다 - (7화) 남자의 시선

단편소설 "선"

by 날갯짓

강남의 한 커다란 빌딩 이층에 있던 한의원은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일 층에 커피숍이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지시대로 병원 근처가 아닌 다음 블록의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 쪽 빈자리에 앉아, 그녀의 퇴근을 기다렸다. 다시 그녀를 만난다는 생각을 하니 손에 땀이 찼다. 꼭 입사하고 싶은 회사의 면접장에서 대기하는 사람처럼 머리에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다리가 떨렸다.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했다. 그래, 뭐 세상에 여자는 많아. 긴장하지 마. 그녀가 나를 먼저 찾았어.라는 생각 따위를 머릿속에 집어넣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를 만나고, 그녀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롭게 다시 선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내 스타일인 여자와 확정적으로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기쁨. 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처음 보는 여자가 내 앞에 앉았다. 하얀 피부와 상반되는 짙은 검은색 머리, 깊은 눈빛에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기, 저 잘 못 앉으신 것 같은데요.”
이 말을 뱉고 나도 모르게 후회했다. 혹 지금 내 앞에 앉은 고혹적인 외모의 그녀가 나를 마음에 들어했거나, 오늘 보기로 한 소개팅 남으로 착각해서 내 앞에 앉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회를 바보같이 날리다니. 아, 나는 지금 그녀를 만나기로 했지. 정신 차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게 명함을 건네줬다. 하얀 명함에는 아까 봤던 한의원 간판의 로고가 들어가 있었고, 또 그 아래에는 한의사라고 적혀있었다. 선 자리에 나왔던 그녀의 직장 동료인 걸까. 내 앞에 앉은 여자의 이름은 '혜수'였다. 나는 그녀를 쳐다봤다. 지난번 소개팅녀가 내게 말했던 단점이 생각났다. 이번에는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지 않고, 그녀의 눈만을 쳐다보려고 노력했다.

“안녕하세요.”
짙은 중저음의 목소리. 나도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친구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녀가 내 얘기를 했다니. 그렇게 박차고 나갈 정도면 아마 긍정적인 얘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앞의 여자, 혜수 씨가 나온 이 상황이라면,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무슨 얘기를 들었냐고 물으려다, 동행이 없다는 사실에 의아했다.

“오늘 친구 분 나오시는 거 맞나요?”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고 나를 보며 한참을 있었다. 그녀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아니요. 제가 연락했어요. 제가 당신이 만나기로 했던 한의사고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저랑 선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인데요.”

“당신에게 호기심이 생겼어요. 제 친구가 당신 얘기를 좀 했거든요. 문자도 보여주고.”

“문자요? 아, 그 문자. 제 친구들이 다 욕하던 걸요. 굳이 그렇게 까지 보내야 했냐고.”

“그래도 재밌었어요. 당신이 선 봤던 제 친구 이름은 아세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몰랐다. 나는 그녀를 알 수 있는 시간을 박탈당했었다. 혜수라는 여자가 말을 이었다.

“실은 제 친구 한의사 아니에요. 한의사는 저고. 그 선에는 나 대신 나온 거예요. 대타라고 하죠.”

“대타요? 그럼 그 선자리는 원래 혜수 씨가 나오기로 되어 있던 거예요?”
나는 다시 확인했다.

“실은 제가 사정이 생겨서 친구가 대신 나갔어요. 그런데 그렇게 매너 없이 행동할 줄 몰랐어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그녀는 미소 지으며 내게 사과했다. 그녀가 나왔다면 어땠을까. 그녀의 눈빛을 보다 보니 눈이 자꾸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 뒤를 보자 카페 내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쳐다봤다. 사람 눈은 다 똑같으니까. 혜수라는 여자는 객관적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공기가 달랐다. 나와 공통점이라곤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여자. 그래도 그녀가 나를 만나자고 했던 그 ‘호기심’에는 충분히 부응해줄 의향이 있다.

“아..... 아닙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혜수 씨가 나왔다면 또 달라질 수 있었겠네요. 혹 저와 만나려고 하신 이유가 다시 저와 선을...”
그때 그녀가 내 말을 잘랐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제 친구의 직업이 좋았던 거예요? 아니면 그냥 인간적으로 좋았던 거예요?”
이 질문의 의중은 무엇일까. 아직도 선녀(선자리 여)에게 마음이 있는지 묻는 걸까. 내 앞의 여자는 나에게 호기심을 느꼈고, 자신이 대타를 보낸 걸 후회하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속물적이지 않고, 혜수 씨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다는 느낌의 대답을 남겨야 할까. 아니면 내 말을 자기 친구인 선녀에게 바로 전달할까,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아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실, 직업은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문자만큼 그렇게 그녀가 좋았던 것도 아니지만, 싫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무척 재촉하셔서, 애프터 신청한 것뿐입니다. 남자로서 진중한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한 점도 있고요”
내가 말하면서도 횡설수설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도 그걸 느꼈는지, 미소가 더욱 커지는 것 같았다.

“진중한 모습이요? 그럼 콘돔은 왜 사셨어요?”

“네?”
콘돔 산 걸 어떻게 알았지? 갑자기 손에 땀이 찼다. 선을 가던 날, 콘돔을 산 걸 본 것일까. 머릿속이 갑자기 하얘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남녀가 만나는데 콘돔 사는 게 죄인가 따져 물으려다가,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걸 산 것을 아셨다면, 굳이 할 말은 없네요. 저를 비난하셔도 좋습니다. 콘돔은...... 그냥 치기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적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는데. 네, 할 말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래도....... 음, 처음에 친구 분이 선자리에 나왔을 때 솔직히 놀랬습니다. 첫눈에 반한 것 같은 느낌은 정확히 모르지만, 만약 그런 사람을 만나 봤냐고 하면, 친구분이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진심입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혜수 씨에게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고요.”
나는 여전히 횡설수설했다.

“저한테 미안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물어보고 싶었어요. 아직도. 제 친구가 좋은지. 실은 당신이 제 친구를 도와주면 좋겠어요.”

“도와주다뇨?”

“음...... 제 친구가 저에게 이천만 원을 빌렸어요.”

“네? 도와달라는 말씀이.....?”
그래서 도와 달라는 말이 금전적인 도움이었던가.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으면, 여기서 경제적인 도움을 바라는 걸까. 아니다. 혜수라는 여자의 표정에는 미소가 있었다. 이 여자는 여유가 있었다. 경제적인 도움을 바라고 묻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제 친구가 돈을 빌린 이유는 남자 때문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남자 때문에요? 아, 남자 친구가 있었나요? 그런데 왜 선에 나온 거죠?”

“그때는 솔로였어요. 며칠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가 연락해 왔어요. 전 남자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비로 돈을 끌어다 썼다고 해요. 아시다시피 삼 금융권은 이자가 세잖아요? 그래서 먼저 갚아주느라 제게 돈을 빌린 것 같아요. 참 바보 같죠. 이미 헤어진 사이인데, 자기도 그렇게 여유가 있는 게 아니면서. 그런데 좀 이상해요. 신용등급이 낮다고 하지만, 거기까지 손을 댈 정도는 아니거든요. 금액도 적고. 충분히 일이 금융권으로 가능할 텐데...... 그리고 지난날의 행적을 보면 그리 믿음직한 남자도 아니에요. 제 친구 욕을 하는 것 같아 말하기 그렇지만, 거머리 같은 남자였어요. 사귈 때는 매번 제 친구의 돈을 야금야금 뜯어갔고, 결국 적금까지 깨야만 했어요. 그만큼 제 친구도 미쳐있었나 봐요. 결국 그놈은 딴 여자랑 바람나서, 제 친구를 버렸었어요. 그러다 돈이 급하니 다시 돌아온 거죠.”

“그래서 제가 무엇을 도와주길 바라시는 겁니까?”
나는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쓰레기 같은 전 남자 친구를 만나서 돈을 갚도록 권고하거나, 혹은 폭력적인 방법을 이용해서 그 녀석을 혼내주라고 하면 그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의향이었다. 한번 본 여자를 위해서 그렇게 까지 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내게 퇴짜를 놨다. 을()에서 병(丙)으로 더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왠지 모를 연민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건 틀림없는 오지랖이었다. 이미 여기까지 와서 그녀의 친구를 만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친구들에게 공연히 욕먹을 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선에 나왔던 그녀의 웃는 표정을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인사할 때 한 번밖에 안 웃어줬구나.

“큰 도움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제 친구의 광고회사와 미팅해주세요.”

“네? 미팅이요?”

“네, 지금 S기업에 다니시는 걸로 아는데 맞으세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미팅이라 하심은?”

“제 친구는 광고 대행사에서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급하게 신규 광고건을 영업해달라고 했어요. 제가 인맥이 많다면서. 꽤나 절실한 것 같았어요. 제가 친구에게 돈은 빌려줬지만, 광고를 해주기에는 개인병원이라 한계가 있어요. 그래도 그쪽이 다니시는 S기업이 어느 정도 인지도도 있으니까, 신규 광고 건으로 미팅 한번 해주실 수 있나 해서요. 그렇다고 광고 체결은 무조건 안 하셔도 돼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군요.”
마침 신규 프로모션의 마케팅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계열사 중 자체 광고 대행사가 있어서 모든 건은 그곳에 물량을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일 적으로라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잘하면 오프라인이나 SNS 쪽은 외주를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광고 건으로 만나보겠습니다.”

“네, 그럼 제가 친구에게 말해서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저기...... 그런데 왜 전가요? 말씀하신 대로 아시는 인맥 많으실 텐데요, 왜 굳이 초면인 제게 연락하셨어요?”

“재밌잖아요. 당신이랑 내 친구 '지혜' 둘 다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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