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선"
이번에도 혜수는 내게 흔쾌히 돈을 빌려줬다. 처음에는 이, 삼천 원, 고등학생 때는 몇만 원, 성인이 된 이후로는 몇 십만 원 단위까지, 혜수는 매번 내게 지갑을 내어 줬다. 금액은 크게 상관없었다. 나도 그녀가 자주 빌려주는 만큼 대부분 돈을 갚았다. 몇 번은 잊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녀는 딱히 돈을 달라고 추궁한 적이 없었다. 아마 나처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는 부자니까. 그녀에게 그 돈은 없어도 될 만한 푼돈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내게 한 가지를 물었다. 이 돈을 어디에 쓰는지 말이다. 아마 내가 안절부절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둘러대려고 했다. 하지만 혜수의 눈을 보면 함부로 뇌까릴 수 없었다. 그녀는 내 속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또 나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했다. 나도 전 남자 친구를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당해왔던 세월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에 대한 신뢰는 이미 사랑이란 단어로 포장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그에 대한 애정을 어쩌지 못했다. 한번 더 믿어보자고. 이번엔 잘해보자고. 나는 그를 구제해주고 싶었다.
결국 나는 혜수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를 쳐다봤다. 혹여 욕이라도 할 줄 알았지만, 혜수는 그저 알겠다고 하며 입금을 해줬다.
ATM에서 돈을 뽑아, 쇼핑백에 넣었다. 재혁은 계좌이체가 아니라, 현금으로 달라고 했다. 자신의 계좌로 돈이 바로 들어오면 사채업자가 자기가 어디에 있든 바로 찾아온다고. 그들이 회사로 갑작스럽게 방문할 경우, 데뷔에 지장이 갈 수 있다고. 우리가 함께 그려가는 미래에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더구나 혹시 내 집이나 회사에까지 들이닥칠 수도 있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TV에서 덩치 큰 남성들이 회사에 와서 깽판을 치던 모습이 생각났다. 내 집까지 찾아와서 난리를 치고, 심지어 내 친구들에게 까지 손이 갈까 봐 겁이 났다. 나는 그 쇼핑백을 은행 밖에서 기다리는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걸로 일단 빚부터 갚아. 다른 데 쓰면 안 돼. 진짜. 도박도 안되고, 악기도 그만 사. 무조건 빚부터 갚아. 약속해.”
“알았어. 걱정하지 마. 진짜 고마워.”
그가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상기된 목소리가 그의 기쁨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등을 쓰다듬어 주는 그의 손이 따뜻했다.
“일단 오늘 빚 갚을게. 저녁에 집에 가도 돼? 오늘도 같이 있고 싶어.”
“응, 나도 좋아.”
“우리 날씨 풀리면 제주도 갔다 오자.”
그의 따뜻한 목소리가 내 깊은 곳에 붙어 있던 잔상을 꺼내 들었다. 우리가 갔던 작년의 제주도. 함께 걸었던 닭머르 해안길. 머리를 쓸어 넘기는 바람과 미세한 바다 냄새. 내 손을 잡던 따뜻한 손과 웃음소리. 그가 쓰는 향수 냄새가 잔향이 되어 올라왔다. 맞아. 내가 사랑했었던 사람이었어.
“언제?”
“다음 달에?”
그가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에 그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줬다. 내 마음에 작은 평화가 일어났다. 그만 사랑한다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왠지 그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나도 속 없어 보이긴 싫었다.
저녁이 되어,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돈은 잘 갚았는지, 오늘 몇 시에 집으로 올 것인지. 삼십 분이 지나도 그는 답장도 없었고, 내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다. 나는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그는 예전부터 내 전화를 바로 받지 않았다. 나는 한번 더 전화를 했다. 그래도 받지 않았다. 한숨이 나왔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설거지나 해야겠다 싶어 고무장갑을 끼는데, 전화가 울렸다. 정선이었다.
“너 미쳤어? 그놈한테 돈 빌려줬다며.”
“혜수가 말했어?”
“아니 그게 중요해 지금? 너 진짜 미쳤지? 너 왜 그래 정말.”
정선은 내게 화를 내고 있지만, 그 목소리에는 날 소중히 대하는 감정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재혁이가 다시 만나재.”
“진짜 미쳤구나. 그래서 오케이 했어? 어린년이랑 바람피우고, 돈까지 뜯어가는 놈한테 넙죽 오케이 하면서 받아줬냐고!”
“일단 진정해봐. 정선아. 나 이번엔 진짜 섣불리 결정한 거 아냐. 재혁이 눈빛이 달라졌어. 좀 진중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돈은 아버지 장례비 때문에 그런 거야. 그리고 이제 곧 데뷔도 한데. 회사도 들어가서, 매달 안정적으로 돈을 갚을 수 있대.”
“그 말을 믿어? 아니, 한두 번 속아?”
“나도 깊게 생각하고 빌려준 거야. 나 그렇게 바보 아니잖아.”
“너 바보 맞아! 진짜 빨리 가서 그 돈 다시 돌려받아.”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지. 재혁이가 그러더라. 자기가 지금 미운털 박혔겠지만, 다시 내 친구들 한테도 잘 보이고 싶데. 앨범 나오고 자리 한번 마련해 달라고. 너, 연희, 혜수까지. 진짜 비싼 밥 한번 사겠다고 그러더라. 좀 어른 스러졌지?”
“야, 나는 빼줘. 너 지금 아무 말도 안 들리는 것 같아. 어떡할 거야, 내 친구.”
정선의 목소리는 이제 한탄으로 바뀌었다. 나는 웃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재혁의 메시지였다. 그가 지금 집 근처에 왔다고 했다. 미소가 번졌다.
“네가 그랬잖아. 인연이라는 게 따로 있냐고. 어차피 남자들 다 고놈이 고놈인 거, 나한테 잘 맞는 놈 고르면 된다고. 네 말대로 나, 이왕이면 내가 좀 더 사랑하는 고놈 고를래. 재혁이가 내 인연이라고 생각할래. 결국 이리저리 돌다가 내게 돌아왔다고 생각할래. 결국 종착지는 나라고. 우리 요새 매일 만나는 데, 재혁이가 맛있는 밥도 많이 해주고, 진짜 나한테 잘해. 어제는 반지도 주더라. 아니, 아니, 프러포즈 이런 거 아니고, 그냥 길 가다가 내가 생각나서 샀대. 실은 나 알레르기 때문에 메탈 반지 안 끼잖아? 그래도 좋더라. 아니, 선물을 받아서 좋았다기보다,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예전에 느꼈던 그 안정적인 느낌을 다시 느끼는 거.”
휴대폰 너머로, 정선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나도 알고 있다. 그녀의 말이 내 귀에 안 들어온다는 것을. 하지만 나 스스로 그를 믿지 못하면, 누가 믿는단 말인가.
“이제 응원해줘, 정선아.”
그때 밖에서 벨이 울렸다.
“어, 재혁이 왔나 보다. 이제 끊을게. 고마워, 정선아.”
나는 통화를 끊고 문을 열었다. 재혁이 내게 입 맞췄다. 그러고는 손에 있던 검정봉투를 들어 흔들었다. 그 속에는 맥주와 과자, 복숭아가 가득 들어 있었다.
“나 복숭아 알레르기 있잖아. 까먹었어?”
“아, 맞다. 나 진짜 정신없나 봐. 요새 너무 바빠서 그래. 미안. 이건 내가 집에 가서 먹을게.”
“휴, 아냐, 그래도 먹는 거만 안되니까, 내가 깎아 줄게. 마음이 예쁘니까.”
“헤헷”
그가 웃는 소리가 나의 웃음을 깨웠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복숭아를 깎으며 그에게 물었다.
“돈은 잘 갚았어?”
“응! 진짜 고마워. 덕분에 한숨 돌렸어. 최대한 빨리 갚을게.”
“응, 또 사채 같은 거 끌어다 쓰지 말고. 이제 착실하게 돈도 모으고, 적금 같은 것도 들고, 알았지? 미래도 생각해야지.”
나는 복숭아와 과도를 내려놓고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그러고는 양 손바닥을 펴서 그의 볼에 지그시 댔다. 살짝 모아진 그의 볼이 꽤나 귀여웠다. 오므려진 입에 입을 맞췄다.
“응, 우리 미래 생각해야지. 이번 노래만 대박 나면, 그 돈은 바로 갚을 수 있을 것 같아.”
“응. 너무 돈에 신경 쓰지 말고, 꾸준히 잘해. 노래 좋더라.”
“진짜 고마워, 나 늦었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그동안 잘못한 게 많아서 달라질 건 없다고, 뺨이라도 맞지 않으면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어. 근데 네가 날 이렇게 받아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실 없이 살았던 거 알아. 그래도 날 받아줘서 고마워. 이제 진짜 잘할게.”
그의 표정이 너무 진심 이어서, 나를 바라보며 하는 그 고백과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내가 바라던 게 이거였다. 오랫동안 길을 잃었던 행복이 이제야 내게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의 품에서 빌었다. 행복아, 여기가 바로 네 자리야. 이제 오래도록 내 속에서 살아가렴. 그리고, 마지막 그의 말은 날 울리기에 충분했다.
“일 잘 풀리면, 결혼하자. 내 년이나 내 후년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