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봤습니다 - (9화) 남자의 시선

단편소설 "선"

by 날갯짓

며칠 후 혜수 씨가 문자로 알려준 주소로 갔다. 광고를 영업하는 쪽에서 우리 회사로 올 줄 알았는데, 혜수 씨는 내게 장소와 시간만 보내왔다. 그 시간에 맞춰 그쪽으로 가라는 것이겠지. 그녀의 말은 쉽게 거스르기가 어려웠다. 그녀에게는 그런 기운이 있었다. 아마 내가 혜수 씨와 사귀었다면 난 매일 그녀의 눈치를 보는데 애를 썼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그녀가 나를 만날 확률은 극히 낮았기 때문이다. 문자에는 상호명이 아닌 도로명 주소와 호수가 적혀있었다. 커피숍이거나 회사일 거라 생각했는데, 눈 앞에서 본 것은 작은 건물이었다. 다세대 주택 같았다. 여기가 그녀가 다니는 광고회사의 사옥인 걸까? 회사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잘해야 세대마다 투룸 정도가 들어갈 만한, 다섯 개 층 정도 되는 낡은 집이었다.

일곱 칸의 계단을 내려가자 101호라고 적힌 곳이 보였다. 일 층이면서 반지하인 건가. 문자에 적힌 장소는 여기였다. 하지만 간판이나 상호명이 적힌 팻말은 없었다. 회색 철문에는 짙은 때가 이리저리 묻어있었다. 문 옆에는 지저분한 박스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만지지 않았는지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도저히 여기가 회사라고 생각되지 않아 주소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그때 문이 갑자기 벌컥 열리면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어후, 뭐야?”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녀가 아닌 어떤 남자였다. 마른 볼을 가진 샤프하게 생긴 젊은 남자였다.

“당신 뭐야. 왜 여기 서있어?”

“아, 여기가 모어 크레이티브 맞나요?”
나는 휴대폰을 주우며 말했다. 모어 크레이티브는 혜수 씨에게 들은 그녀의 회사 이름이었다.

“누가 보냈어?!”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공격적인 자세에 나는 살짝 뒤로 주춤했다.

“누가 보낸 건 아니고요. 미팅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혜수 씨는 자신의 얘기는 하지 말아 달라고 했었다. 친구의 지인을 통해 광고를 영업했다는 사실을 구태여 그녀의 직장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미팅? 이 대낮에 이런 반지하에서 무슨 미팅이야. 미팅할 거면 헌팅 술집 가세요. 아저씨.”
그가 내 몸을 밀치며 말했다. 나는 계단에 걸려 넘어질 뻔했으나, 중심을 다 잡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

“뭐 하는 겁니까. 아니면 아닌 거지.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어허, 이것 봐라? 남의 집 앞에서 뭐했는데? 도둑놈이 더 성내네? 어?!”
내가 뿌리친 손에 기분이 나쁜 건지, 그가 자기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가 내게 더욱 공격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뒷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며 그의 공격을 방어할 자세를 취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여기로 장소를 받았습니다.”

“자기야, 누구야?”
그때 어떤 여자가 101호에서 나왔다. 색이 바랜 분홍색 파자마 차림이었다. 그녀의 낯빛은 어두웠고 입술이 건조해 보였다. 목소리는 마치 메마른 낙엽을 구두로 잘게 부수는 소리처럼 갈라져 들렸다. 그녀는 환자처럼 매우 아파 보였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우리 집을 염탐하고 있더라고!”

“아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나는 명함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가 내 명함을 받더니, 나를 쳐다봤다.

“돈 받으러 온 건 아닌가 봐? 저리 꺼져. 이 새끼야.”
그가 내 명함을 던지며 말했다. 그러고는 등을 돌리며 여자를 데리고 다시 집에 들어가려고 했다.

“지혜 씨, 여기 지혜 씨 안 계신가요?

나는 혜수 씨에게 들은 선녀의(선자리 여) 이름을 꺼냈다. 지혜 씨가 안에 있을까?

“응?”
그녀의 이름을 듣자 그 남자가 등을 돌려 나를 봤다. 그러고는 갑자기 다시 뒤를 쳐다봤다. 뒤에서 파자마 차림의 여자가 신발을 끌며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어두운 낯빛이 더욱 탁해지고 있었다.

“오빠, 이 사람이 지혜 언니를 어떻게 알아? 오빠 지혜 언니 만났어?”
여자가 남자의 팔을 세게 낚아채며 물었다. 남자는 당황한 듯 그녀와 나를 연달아 쳐다봤다.

“아니, 아니야. 안 만났지. 몰라. 나도 이 새끼가 여기 와서 왜 걔를 찾는지.”
그가 말을 더듬었다. 갑작스럽게 목 뒤가 선득선득했다. 느낌이 왔다. 이놈이다. 버러지 같은 그녀의 전 남자 친구, 그녀의 등골까지 빼먹어 놓고, 더 어린 여자와 바람피워 도망갔다는 그놈. 헤어지고도, 아버지의 장례비가 모자라 그녀에게 돈까지 빌리러 왔다는 그놈. 갑자기 미움이라는 감정이 주먹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난 주먹을 꼭 쥐었다. 나는 그가 그 쓰레기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졌다.

“저기...... 아버님 장례식은 잘 마무리하셨어요?”
내 물음에 그가 나를 향해 한번 더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돌리는 힘에 팔을 잡고 있던 여자의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그 남자는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나를 쳐다봤다.

“뭐, 이 새끼야?”

“오빠, 장례식 이라니?

“아, 나와. 야 이 새끼야, 너 여기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그가 옆에 있던 여자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나뭇가지 같던 그녀의 작은 팔은 그래도 꿋꿋이 다시 그의 팔을 잡았다. 그 남자는 갑자기 짜증이 났는지, 옆에 있던 여자의 어깨를 밀어버렸다. 여자가 넘어졌다.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나는 그의 손을 밀었고, 넘어진 여자를 부축해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시발, 손대지 마, 이 새끼야!”
갑작스럽게 생경한 감각이 얼굴에 일었다. 그리고 복부로 오는 충격에 밀려 뒤로 넘어졌다. 옆에서 여자가 울고 있었다. 나도 몸을 일으켰다. 그를 손봐줘야겠다.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이 놈을, 지혜 씨를 힘들게 했던 이 놈을, 지혜 씨를 속이는 이 놈을. 사실 나도 왕년에 운동 좀 했었다. 나는 오 년 전에 체육관에서 배운 대로 손을 올려 가드를 취하고, 그에 맞춰 삼 번 스텝을 밟으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 오래된 건지, 아니면 그가 친 광대 부분이 얼얼해서 인지, 스텝이 생각나지 않았다. 꼬인 내 발을 보며 스텝을 다시 밟아 보려 했는데, 내 앞의 남자는 그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의 발길질에 나는 또 넘어졌다. 갑자기 피가 머리로 쏠렸다. 숨이 가빠졌다. 오로지 내 앞의 남자에게 상해를 가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 그에게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그는 살짝 피하며 나의 다리를 쳤다. 나는 무게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했다. 나는 넘어질 것 같아 그를 잡으려 했지만, 그는 내 팔도 살짝 피하더니, 무릎으로 내 배를 가격했다.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호흡곤란으로 의식을 잃을 뻔했다. 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바지자락을 잡았다. 미친 듯이 끌어당기는 내 힘에 그도 같이 넘어졌다. 나는 그의 위에 올라타려고 했으나, 야속하게도 그 젊은 놈이 나보다 힘이 더 셌다. 그가 나를 밀쳐냈다. 분명 나보다 말랐는데 힘이 더 세다니, 세월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일어났다. 심호흡을 했다. 겨우 숨이 쉬어졌다. 타격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살을 내어주고 뼈를 깎으리라. 주먹으로 안되면 물기라도 해야겠다. 나는 다시 한번 몸을 날렸다. 그때 옆에 있던 분홍 파자마의 여자가 끼어들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렸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걸 수 없었고, 여지없이 그녀와 부딪쳤다. 그 충격으로 그녀도 나와 함께 뒤로 밀려났고, 그놈에게 부딪쳤다. 충격으로 꺾어진 그녀의 머리가 그의 턱을 날려버렸다.


우리는 샌드위치처럼 드러눕고 말았다. 나는 여자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이성이 조금 돌아왔다. 몸을 일으켰다. 그녀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턱을 가격 당한 그놈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일어난 여자는 허리를 숙이며 바닥을 향해 침을 흘렸다. 어두웠던 낯빛이 더욱 어두워져 얼굴에 핏기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녀에게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주려는데, 손등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코 밑이 뜨거웠다. 나도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눈물, 콧물, 침까지 흘리던 그녀가 철퍼덕 그의 앞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그가 숨을 쉬는지 코에 손을 대봤다. 다행히 의식이 있었다. 그 여자가 나를 노려봤다.

“당신 누구야! 우리 오빠한테 왜 그래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 앞의 여자가 불쌍했다. 그놈은 너를 속이고 예전의 여자 친구를 다시 만났고, 그녀를 속여 돈 까지 또 뜯어낸 놈이란 말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 그가 일어나 나를 노려봤다. 그의 구겨진 미간을 보니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차전인가. 그때 저 멀리 사이렌 소리를 내며 경찰차가 오고 있었다. 누군가 신고한 것이다. 다행이었다. 이미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황이었다. 하긴, 조용한 동네에 삼십 대 둘이 애들처럼 소리 지르고 욕하고 치고받고 싸우는 데 신고할만했다. 경찰은 우리들을 연행했다.





지난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합의를 종용하는 경찰과 그의 만행을 알리는 나. 그리고 내가 파자마를 입은 여자의 몸에 손을 댔다고 성희롱으로 쳐 넣으라는 그놈. 그 옆에서 여자는 그저 울고 있었다. 그녀의 낯빛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내 앞에서 조서를 쓰는 경찰도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그녀에게 몇 가지 질문만 하고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놈에 대한 배신감 때문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집에 가고 싶은 건지, 또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순수해서인지 그녀는 경찰의 질문에 아무 거짓 없이 대답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최근에 수술을 받았었다. 낙태 수술이었다. 남자의 권유로 애를 지웠다는 것이다. 수술비는 남자가 최근에 지불했다고 했다. 아마 그 돈은 지혜 씨에게 빌린 돈일 것이다. 바람피워 새로 사귄 여자의 애를 지우기 위해 바람나서 버린 전 애인에게 돈을 빌리다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쓰레기였었다. 아까 더 패줬어야 했는데. 그녀의 진술에 분위기가 내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상해 건에 대해서는 합의를 할 의향이었다. 그저 그 쓰레기 놈이 사기죄든 뭐든 콩밥을 먹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경찰은 남자가 돈을 절도한 상황도 아니고, 간통죄도 없어진 마당에 결혼도 안 한 남녀의 문제를 법률로 심판할 수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지금 상황은 피해자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죄를 입증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저 조용히 합의하고 가시라고.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재혁아!”
그때 문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녀였다. 선 이후로 처음 보는 그녀. 그녀가 달려 내 옆으로 왔다. 살짝 갈색이 도는 머리가 뛰는 반동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는 급히 연락을 받고 왔는지, 가방도 들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인사하고 싶었다. 아니, 그것보단 칭찬받고 싶었다. 내가 그의 진실을 까발렸다고. 당신, 사기당할 뻔했다고. 당신 또 속을 뻔한 거 내가 구했다고. 나한테 밥 이상은 사야겠다고. 술도 괜찮고. 당신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오늘의 폭력에 대한 피해는 까맣게 잊을 수 있다고.



“아, 지혜 씨, 오랜만입니다. 아니, 그것보다 마침 잘 오셨어요. 글쎄 이놈.....”
그 순간 그녀가 내 뺨을 후려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내 앞의 경찰도 의자에서 허벅지를 뗐다가 그 자세로 멈춰버렸다. 재혁이란 놈도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를 제외하고 모두가 놀란 표정이었다.

“아..... 아......”
나는 충격으로 정형화된 단어를 말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나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났다.

“왜, 왜 제 인생에서 안 꺼지는 거예요. 왜 도대체 왜!”

그녀는 내게 소리쳤다. 깊은 슬픔이 그녀의 얼굴 전체에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쳐다봤다. 나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녀의 눈은 생각보다 컸다. 내 멱살을 잡고 흔드는 와중에도 보이는 그녀의 눈은 생각보다 맑았다.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눈은 투명했고, 깊었다. 그녀의 눈은 체계적으로 아름다웠다. 왜 첫 만남에는 몰랐을까. 그녀는 눈이 예쁜 여자였다.

“아..... 합의하겠습니다. 이제 집에 가도 될까요?”
나는 선채로 경찰에게 말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게 종이를 주며 합의문에 서명하라고 했고, 나는 잠자코 서명했다.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눈을 마주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나는 바닥을 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혜 씨. 이름까지 알게 돼서 기뻤습니다.”

밖으로 나가 마주한 달은 보름달이었다. 생각해보니 지난번 그녀를 만나는 날에도 보름달이 떴다. 내 속도 모르고 아름답게 핀 달이 야속했다. 나는 터덜터덜 걸었다.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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