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선"
어떻게 보면 예견된 과정이었고, 확정적인 결말이었다. 나를 버렸던 이유인 그 여자, 분홍색 파자마 차림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 여자를 경찰서에서 보았을 때, 재혁이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내게 보인 변화된 모습, 속삭였던 달콤한 고백, 내가 착각했던 그 미래는 모두 모래성에 불과했다. 견고하리라 생각했던 내 성은 예견된 파도에 쓸려 확정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는 어지러웠다.
혜수에게 돈을 다시 돌려주던 날, 혜수는 나를 안아줬다.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알려줬다. 재혁은 총체적으로 거짓이었다는 것을.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었다. 사실 아버지의 존재 여부도 희박했다. 그는 가족과 연을 끊고 살았다. 재혁과 처음 사귀었을 당시 그는 자신의 가족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내 물음에도 자주 숨기려 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가족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고, 그것에 대해 잘 묻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나이가 많은 연상 여자답게 가여운 그를 보듬어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아버지가 살아있으신지, 연락은 하는지 조차 몰랐다.
또 그는 회사에 들어가지도 않았었다. 알고 보니 내게 들려줬던 대중적인 노래는 인디밴드의 노래였고, 그 후렴 가사 또한 다른 곡들에서 짜깁기 한 가삿말이었다. 그저 그는 여자 친구의 애를 지우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예전에 호구였던 나에게 접근했다 라는 단순한 이야기였다. 그저 귀에 대고 몇 번 사랑을 고백해주면 간이고 쓸개고 내어주는 전 여자 친구를 이용한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형편없는 이야기였다. 혜수는 내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사실 혜수가 재혁의 많은 부분을 알고 있던 건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싶기도 했고.
“그래도 다행이야, 그 남자 덕분에 살아남았네. 뺨까지 때렸다면서. 재미있어, 아주.”
혜수가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경찰 중에도 그녀의 인맥이 있나 싶었다. 정신도 없고 내 컨디션도 안 좋아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날 안고 염려하는 혜수의 눈이 조금은 달라 보였다. 그녀는 왠지 생기 있어 보였다. 목소리도 조금 상기되었다고 할까. 뭔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 사람 같았다. 그래도 그녀가 고마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난 한 달 동안 미친 사람처럼 일을 했다.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나이가 차며 자연스럽게 습득한 지혜에 따르면, 힘들고 우울하고 좌절한 상황일수록 몸을 더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할수록 생각이라는 놈은 갈수록 가지를 뻗어 나를 덮치고, 우울은 바닥이 없는 늪으로 나를 더욱 침전시킨다. 그러므로 움직여야만 했다. 혜수는 내게 더욱 많은 광고건을 잡아주었다. 덕분에 나는 쉴 새 없이 일을 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많은 실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내 입지가 넓어지자, 차장은 언제 나와 싸웠냐는 듯 내게 친절하게 대해줬다.
“우리 팀에 지혜 씨 같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야 내 의도가 통했네. 이게 바로 팀이지. 허허, 팀장님, 우리 연말에 좋은 곳에서 회식해야겠어요.”
어이가 없었다. 사이코패스 같은 그를 다른 팀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왠지 싸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기존에 팀장과의 약속대로 라면 충분히 차장을 보내 버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심적으로 그만 부딪치고 싶었다. 지쳤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나는 그저 앞만 보면서 내 일을 하고 싶었다.
정선과 연희는 주말마다 우리 집에 찾아왔다. 우리는 매일 주책맞게 놀았다. 어린 얘들처럼 놀이동산에 가서 교복을 입고 놀기도 했고, 비 오는 날 캠핑장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고, 연희가 아는 용한 점집에 따라가기도 했다. 술은 먹지 않았다. 매일 술이 당겼지만, 술로 나를 대신하고 싶지 않았다. 술이 나의 상처 속에 침투하지 않기를 바랐다. 혜수는 주말에 일이 많아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주었다. 고급 식당을 예약해 주기도 했고, 호텔도 몇 번 잡아주었다.
“그래도 연락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혜수가 예약해준 호텔에서 쉬고 있을 때, 연희가 말했다.
“뭘 연락해, 그냥 다 잊어, 아예 새 출발한다고 생각해.”
정선이 말했다.
“에이, 그래도 뺨까지 때렸는데. 그 남자 아니었어봐, 지금도 그놈한테 빠져서, 아차.”
연희가 거기까지 말하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휴, 눈치 없는 병 언제 고쳐? 겨우 잊어가고 있는데! 그 남자 만나면 다시 그 일 생각날 거 아니야? 과거는 과거로 묻어둘 필요가 있어. 그리고 그 남자도 예전에 정상적인 놈이었냐고? 아니잖아?”
“그래도 나쁜 남자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래서 다시 만났다고 치자. 얘한테 좋은 감정이 있겠냐? 억울하게 뺨까지 맞았는데? 혹시 몰라. 걔가 복수한다고 욕 하고 뺨이라도 때려봐? 아니면 피해보상이라도 요구하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 응?”
“야, 둘 다 그만해! 됐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은 이 언니가 쏜다.”
나는 둘을 말렸다. 나도 생각이 복잡했다. 사실 몇 번은 연락하려고 했다. 내 휴대폰 속 '변태 새끼'라고 저장한 그 남자에게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가 수십 번은 고민한 것 같다. 하지만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방을 나서려는데, 문 앞에서 혜수가 갑자기 나타났다.
“짜잔, 닭발이랑 엽떡 사 왔어.”
혜수의 손에는 음식을 담은 봉투가 가득했다. 위스키도 있었다.
“와, 역시 우리 혜수!”
연희가 몸을 날려 혜수를 안았다.
“야, 음식 엎어져!”
정선이 양손으로 봉투를 받치며 말했다.
나는 웃었다. 나를 혼자 두지 않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당시기오'라고 적힌 문을 천천히 당기며 들어오는 그가 보인다. 나도 일어나 그를 맞았다. 다이어트를 했는지, 많이 수척해진 느낌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말끔하게 정장을 입고 온 그를 맞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앉으세요.”
“아, 네.”
그가 앉으며 나를 쳐다봤다. 처음 봤던 그때가 생각났다. 선을 보는 날 편의점에서 콘돔을 사고 여자 종업원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던 모습, 그리고 나를 이리저리 눈으로 훑던 그 모습. 그는 조금은 달라졌을까. 자리를 박차고 나간 나도 그때와 같을까. 나는 그의 눈을 쳐다봤다. 그도 나의 눈을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의 가지런한 치아가 보였다. 아, 혜수의 휴대폰에서 처음 봤던 흑백사진의 그 치아였다.
“잘 지내셨어요?”
그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정말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이었다.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머리가 더욱 빈약해 보이기도 했다.
“네. 생각보다 잘 지냈네요. 잘 지내셨어요?”
“네, 저도 잘 지냈습니다. 하하.”
그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머리를 긁는 그가 순수해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쳐다봤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짙은 눈썹과 쌍꺼풀 없는 눈, 작은 코, 수척해진 뺨, 그 뺨을 보니 경찰서에서 사정없이 갈겨버린 그 날이 생각났다. 누군가의 얼굴을 그렇게 세게 때린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실 그 이후로 그가 나를 무척 증오할 것이라 생각했다.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꽤 크니까. 왜 그는 내게 화내지 않았을까. 왜 내게 해명하지 않았을까.
그를 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가 더욱 쑥스러운 듯 안절부절못했다.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다. 내 눈치를 보는 것일까.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 그날처럼 다시 선을 보는 느낌이 드네요. 아, 방금 멘트는 죄송해요. 제가 실은 눈치가 없습니다. 하하. 그러면 바로 일 얘기로 넘어갈까요? 이번에 론칭한 SNS 프로모션 건인데요. 보유하신 채널을 확인해 봤을 때....”
“일 얘기는 나중에 해요.”
나는 한 손을 뻗어 그가 펼친 자료를 덮었다. 그가 살짝 당황한 듯, 네, 네, 저야 좋죠.라고 작게 말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사실 연락드리기 좀 겁이 났어요. 많이 망설였던 부분도 있고. 제가 사과를 드리고 싶은 점이 많아요. 음, 처음 한의사라고 생각하고 자리 나오셨을 텐데, 선 보는 입장에서 일단 속인 것 같아 죄송해요. 그리고, 그날 박차고 나갔던 건...”
“지혜 씨, 사과 안 하셔도 돼요. 그때 문자를 그렇게 보낸 건, 지혜 씨에게 사과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시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가 말했다. 예전에 내게 사과하라고 했던 문자가 생각났다. 나는 더 말하려고 했지만, 그가 재차 말렸다. 나는 그에게 사과할게 많았다. 직업을 속인 것도, 선자리에서 박차고 나간 것도, 그의 뺨을 때린 것도, 그리고 광고주가 되기 위해 나와준 것도. 사실 모두 고맙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예전 일에 대해 얘기하지 말자고 했다. 모든 일에는 모든 이유가 있다고, 과거에 생긴 일은 나중으로 미뤄도 된다고. 오늘은 그저 우리의 얘기를 하자고 했다. 이렇게 다시 앞에 앉게 되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고 했다. 그가 앞으로의 얘기를 하자고 했다. 우리는 서로 미소 지었다.
저녁을 먹고 나왔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졌다. 나는 가까운 편의점을 가리키며 가자고 했다. 안쪽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계산대로 가려는데 그가 여 점원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에 편의점에서 봤을 때처럼 점원을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다. 개버릇 남 못주는 걸까. 굳이 지금 상황에서? 한참 어려 보이는 여 점원을 보고 있는 그의 눈빛이 떨려 보였다. 그러다 그가 갑자기 나가버렸다. 왜 저러는 걸까. 나는 물건을 계산하고, 나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실은 제가 금연 중이거든요. 편의점 계산대에서 담배만 보면 그렇게 사고 싶어요. 습관적인 건데, 참는 게 힘이 든다고 할까. 자꾸 안절부절못해요. 하하. 좀 지질해 보이죠?”
그렇구나. 정선이의 말을 빌리자면 발정 난 개 마냥 헥헥 대는 변태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점원 뒤에 있는 담배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휴대폰에 '변태새끼'라고 저장했는데, 수정해야겠다.
“아니에요. 금연이 진짜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음, 음, 근처에 괜찮은 맥주 집 있는데, 드시고 가실래요?”
“와! 좋습니다. 좋아요. 진짜 좋아요. 좀 더 앞으로의 얘기를 하시죠.”
모든 것들이 다 오해였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내 마음속 무너진 모래 성에는 아직 모를 내가 남아있다. 그곳의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더 슬퍼지고 더 불행해질지도. 하지만 나는 이제 그곳에 건물을 세우지 않을 것 같다. 과거를 회상하며 나를 가두는 행동은 그만하기로 했다. 그곳은 뻥 뚫려 있는 숲이 되기를 바란다. 그가 앞으로의 얘기를 하자고 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