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코로나로 업계가 직격탄을 맞으면서 휴직 중이고, 집돌이라 딱히 변화된 일상을 경험하고 있지는 않다. 유튜브 속 다른 사람들의 브이로그에서도 외출 자제에 따른 일상이 똑같아지면서, 점차 영상의 패턴이 단순화되기 시작했다. 또는 서서히 게시물을 올리지 않아 유령 계정이 돼버리는 사태도 자주 눈에 띈다. 사실 브이로그든 글쓰기든 소재가 중요하다. 내 정해진 삶의 루틴을 소개하는 것은 보통 1~2회면 충분하고, 새로운 것, 나를 자극하는 것, 나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들을 적거나 촬영해야 보통 할 맛이 난다. 코로나는 그러한 루틴조차 파괴하며 우리의 삶을 보다 단순하고 심심하게 만들어버렸다. 나에게도 재미없어져 버린 일상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미없을 것이라 생각하게 만들고, 그 불안감은 사람들의 자존감도 박살 내는 듯하다.
코로나로 인해 매일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 자체가 한계에 봉착했다. 사소한 것을 쓰는 게 일기라지만, 일상이 너무 똑같다 보니 재미가 없어졌다. 어느새 내 일기장은 계속 비게 됐다. 그러다 보니 내게 존재하는 내가, 내가 기억하는 내가 서서히 잊혀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사실 나는 글쓰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생각 하나하나를 작성하며 나를 채워가는 형태에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게으름 때문에, 책상 앞에 앉아 하얀 A4용지를 마주하는 그 자체가 내게는 굉장히 버겁고 귀찮았다. 영화나 웹툰, 유튜브 등 콘텐츠를 소비하다 보면 사실 소재거리는 많아진다. 더군다나 나는 생각과 상상을 많이 한다. 영화나 웹툰에서 보여주는 스토리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감독의 의중은 무엇인지, 왜 작가가 저렇게 써야만 했는지, 저기서 나오는 떡밥은 나중에 어떤 식으로 역할을 할지 미리 상상을 하게 되고, 대부분 내 생각이 맞는 경우가 많다. 쓸거리(껀덕지)는 굉장히 많지만, 막상 마음먹고 책상 앞에 앉으면 ‘무엇을 써야 하지? 왜 써야 하지?’라고 스스로 반문하는 시간이 많다. 생각과 창작은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한번 더 실감하게 된다.
오늘 김영하 작가가 유튜브 알고리즘에 떠서 영상을 봤는데, 그의 말 실력과 인물 자체의 매력에 빠져 어느 순간 수십 개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미 고명한 작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지만, 글쓰기에 대해서는 학교 선생님처럼 친근했다. 특히 잡학 다식한 그의 비유와 묘사들은 모두 내가 받아 쓰고, 계속 복기하면서 달달 외우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 그는 인간의 직업 중 가장 빨리 죽는 직업이 작가라고 말했다. (오래 사는 직업 1위는 종교인, 2위 정치인, 3위 연예인, 꼴찌 작가) 작가가 아마 일찍 죽는 이유는 오랜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깊이 침투해 생각을 쥐어짜는 형태는 최소 거북목을 야기하고, 거기다 각종 디스크 문제들을 동반한다. 거기다 혼자와의 싸움은 얼마나 고독한가. 아마 인풋 대비 돌아오지 않는 보상도 스트레스의 원흉일 것이다. 또 작가들은 정년도 없다. 죽을 때까지 쓰는 것이다. 나이가 무척 많은 노인 작가들에게 “뭐하세요 요즘?” 이렇게 물어보면 둘 중에 하나다. 작품을 쓰거나,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거나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쓴다.
작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계속 쓴다. 일상은 물론 전쟁 중에도 쓰고, 심지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조차 쓴 사례가 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글을 썼을까. 아마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그 이유는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증명’ 하기 위함일 것이다. 지금에서야 컴퓨터로 타이핑을 하며 쉽게 글을 쓸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고, 피드백을 해주는 독자들이 있다. 더군다나 이렇게 글을 씀으로 인해 운이 좋아 출판을 하고, 수익이 생기거나 명성을 얻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예전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가 언제든지 적군의 총탄에, 단두대의 칼날에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미래의 수익과 명성까지 고려하며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 글이 누군가의 손에 얹어지는 ‘영광’조차 누리지 못한 채 영원한 어둠 속에 영면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썼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하기 위해서. 인간으로서의 ‘나’를 잊지 않으려고.
설사 상상력에 좌우되는 픽션인 문학 소설의 경우에도 위와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이 어려운 시대상을 겪으면서 발생하는 일을 상상해 봄으로써, 자기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좀 더 심화해서 사유해 봤을 것 같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는 디스토피아적 상황에 놓인 한 인물의 몸부림과 절망이 나온다.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을 겪었던 경험으로 극단에 빠진 사상의 위험성을 보다 과장하여 한 인간이 그 속에서 어떤 절망과 생각을 경험하고, 어떤 희망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 사유하고 고찰했을 것이다. 그가 글을 쓴 이유는 돈을 벌고자 함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사상에 대한 지각없는 맹목적 신념의 위험성을 경계하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가장 앞선 가치는 그 자신을 대입해보는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은 도망치지 않고 어떠한 태도로 임해야 하는 가를 마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꼬깃한 종이 위에서라도.
목숨을 걸고 쓰는 사람들. 나는 일상이 똑같다고 불평할 때, 누구에게는 그토록 바라던 일상일 수도 있다. 나는 그 일상을 감사히 여기고 써야 한다. 경험을 넘어서는 가치를 스스로 찾는 사람이 되자. 글쓰기를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