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내가 가진 희망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신부님께서 매번 주시는 질문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힘이 있다.
희망은 '당연히 이뤄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물어보심에
다시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
10대 때는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희망이었고,
20대 때는 열심히 준비해서
원하는 곳에 취업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결혼하는 것이 희망이었으며,
30대 때는 열심히 일하고 성장하며
사랑하는 아이를 잘 키우는 게 희망이었다.
참 구체적이고, 목표지향적인 희망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희망은 하나씩 이루어졌고,
또 하나씩 실패했다.
어느 순간
실패가 희망을 훨씬 넘어서기도 했다.
신앙 글쓰기 안에 다양한 연령대가
모여 함께 하고 있음에 감사한다.
지난 시간을 회상하고 성찰하면서
그들을 통해 다시 배우고
또 현재의 나를 성찰하게 된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이는 사실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지금이기에 가능하고
또 일찍 그때 알았더라도
삶이 크게 달라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기에.
10대, 20대, 30대의 실패와 좌절 없이
어떻게 인생의 성장을 논할 수 있을까?
'결핍'이 소중한 이유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채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글로만 결핍을 이해하고 공부한 사람과
온몸으로 이를 경험한 사람의 삶은
성장의 질과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결핍을 통해
나를 알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게 하고,
나의 결핍을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함께 채워나가야 함을 배우게 된다.
신앙 안에서 우리의 결핍은 더 그러하다.
늘 부족한 결핍 상태의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불러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늘 제자리이다.
선교는 열심히 하지만
주님의 삶을 따라 살려는 신자는 많지 않고,
교회의 수가 불어나도
세상의 모습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여전히 결핍을 경험하지 못한
풍요로움이 가득한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기 때문인 걸까.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
처럼.
이제 내게 희망은
구체적 실체가 아닌
그냥 존재의 이유이다.
애쓰지 않아도 편히 주님의 뜻을 따르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길에 함께 하며
삶과 신앙 안에서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이
감사와 은총 가득한 시간이 되도록 하는
나의 희망은
곧 삶과 신앙 안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 자체이기에
희망의 끊을 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