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계단, 실타래

자살예방교육에 참여하며

by 박 윤여재


프롤로그.



여기 죽음밖엔 길이 없다고 생각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한 걸음도 걷기 힘들 만큼

더 이상 한 숨을 내쉬기도 힘들 만큼

지쳐버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 곁에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그에게 다가가

마음을 열고

그의 소리를 듣고

그에게 물어주었습니다.

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의 아픔을 들어주고

그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가 지닌 책임의 무게가

때론 버겁고 힘겨울 지라도

용기 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의 따뜻한 사랑과

그의 든든한 연대와

그의 진실한 공감이

오늘 또 누군가를 살게 해 준

아름다운 힘이 되었습니다.


우린 힘든 누군가가 될 수 있고

곁에 있는 누군가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지나치지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공감하며

함께 지지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되어주길 바래봅니다.






1.


고통이 다가왔다.

얽히고설킨 커다란 실타래처럼.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



2.


너무 늦었다.

내가 풀기엔.

아무도 없다.

나 혼자 뿐.

깜깜한 어둠뿐.





3.

그래도

애썼다고, 노력했다고

힘들게 무겁게 받치고 있었다는 걸

누군가 알아줄까?


....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난 이제 혼자고

이제

다 끝났어.‘





4.

이제 됐어,

이제 그만하고 싶어.

이제 좀,

쉬어야겠어.

이제 좀,

편해지고 싶어.



5.

“이봐요, 이봐요”

누군가 나를 흔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겨우 눈을 떴다.


주변이 온통 눈이 부셨다.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세요, 갈 데가 있어요.”





6.


일어나 보니 먼 길 앞이었다.

아득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당신, 누구세요?

미안하지만 전 힘이 없어요.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


그는 대답 대신 내 손을 꽉

힘 있게 잡아주었다.



7.


신기했다.

순간 몸이 꿈틀 했다.

걷고 싶어 졌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이

그저 기뻤다.

‘그는 누구일까?’



8.


그는 내 곁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 발걸음을 맞춰주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죠?”

이 말 외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고,

잡은 손엔 힘이 있었다.





9.

걷다 보니 어느새

첫 번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내게 힘이 생긴 걸까?’

“나쁜 생각을 할 만큼

그렇게 힘들었던 거죠? “

다시 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힘든 슬픔이 배어 있었다.

나만큼 그렁그렁.





10.

잠시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그렇게 한참

아주 많은 얘기를 했다.

두서없이,

울다가,

가끔 웃기도 했다.

얘기를 들으며 그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이 끄덕이는 것 같았다.




11.


생각해보니

좋은 기억도 많았다.

행복한 순간도,

고마운 사람도 많았다.

커다란 실타래 무게만큼

내 마음이 지워지고

비워졌나 보다.

“지금 누가 제일 생각나요?”





12.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 손잡고 다녔던 시골집 슈퍼도 생각났다.

성당 수녀님이 보고 싶어 졌다.

내게 너무 잘해주셨는데.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미운 우리 형아도 생각났다.

그리고 내 가족...

내 가족이 생각났다.


그래서 울었다.

그리워 울었다.

미안해 울었다.

보고파 울었다.

그렇게 살고 싶어 울었다.



13.


그는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내 얘기를 들어주고

함께 울어주었다.

그리고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옆에 있던

커다란 실타래가

내 맘 안에 들어왔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돌아보니 어느새

두 번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14.

두 번째 계단에 잠시 앉았다.


함께 실타래를 풀었다.

“어떻게 실타래를 풀까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호히 끊어버리거나

하나씩 천천히 힘겹게 풀어가거나.

“천천히 다시 풀어 볼게요.”


힘이 생긴 걸까?

그렇게 그만두고 싶었던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던

쳐다보기도 끔찍했던

저 커다란 실타래를

다시 풀고 싶어 진 것이다.





15.


조금씩 실타래를 풀다 보니

다시 세 번째 계단이다.


계단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우린 말하지 않았다.

묻고 싶었지만

또다시 주저 않게 될까

두려웠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그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실은 내게 묻고 싶은 질문이라는 걸.

“다시 시작할 수 있어? “

“사실, 죽고 싶을 만큼

정말 살고 싶어. “

정말이었다.

누군가 날 잡아주길

얼마나 간절히

바랬는지 모른다.





16.


힘겹게 오르던 계단이

어느새 네 번째 계단이다.


걸음이 빨라졌고 가벼웠다.

천천히 다가와 그가 말했다.

“우리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충분히 혼자 갈 수 있어요

당신, 충분히 멋진 사람이에요.

필요할 땐 언제나 곁에 있어 줄게요.

아프지 말고, 울지 말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이젠 웃으며 만나요. “


그가 환히 웃으며 떠났다.

그렇게 천천히

우린 네 번째 계단에서

헤어졌다.





17.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누구였을까?’

어릴 적 첫사랑이었을까?

중학생 때 짝사랑하던 국어 선생님이었을까?

돌아가진 우리 할머니셨을까?

갑자기 떠나버린 우리 형아였을까?

아님,

우리 막내딸이었을까?

아님,

진짜 천사였을까?





18.

그가 떠난 자리는

여전히 따뜻하고

여전히 든든하다.


내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리지만

힘 있는 박동이었다.


19.


이제 다섯 번째 계단.

드디어 마지막 계단이다.

그곳엔 문이 있었다.



20.


함께 온 먼 길을 걸어

문 앞에 섰다.

다시 혼자다.

누군가에겐

고작 다섯 계단이지만

내겐

힘겨운 발걸음이었다.


그래도 난

문을 열고 싶어 졌다.

문을 열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졌다.

이젠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다.






에필로그.


오늘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을 마치고 있습니다.


자살예방교육을

공부하고,

교육하는 일은

'열심히 한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무게감이 큰 일입니다.


능력과 노력을 넘어

내 삶의 가치와 신념을 넘어

그 안에서

함께 성장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날은 너무 힘들어서

어떤 날은 그 무게감에 짓눌려서

기도하듯

고백하듯

토해내듯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을

위로하고 교육하는 일은

머리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겨우 한걸음을 떼었습니다.

가는 길 중단 없이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따뜻하게

함께 가길 희망합니다.


2020.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