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머리를 맑게 해주는 곳을 찾아보고 싶었다. 다른 곳을 가지 않더라도 세븐시스터즈는 꼭 가보라고 했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하얀색 절벽 너머로 수평선 끝까지 펼쳐진 바다가 눈 한가득 담기는 것을 보면 분명 영국은 바다의 나라다. 초원과 바다 그리고 기암괴석의 어우러짐에 감탄하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질문을 던진다. 친구 말 듣길 잘했지?
# 기타 타고 가는 길
런던에서 주어진 선물 같은 시간. 나는 열차를 타고 런던 도심에서 벗어나 근교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내가 정한 목적지는 브라이튼에 위치해 있는‘세븐시스터즈’. 세인트팬크로스역에서 브라이튼행 왕복 티켓을 끊었다. 가격은 장당 18.2파운드. 환화로 27,000원 정도이다. 내가 탔던 열차는 ‘Southeastern’이라는 이름의 열차로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 ITX와 같은 국철의 종류다. 기차를 타고 1시간 여를 달렸을까. 화려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마을과 광활한 초원에 시선을 뺏기다 보면 어느새 브라이튼역에 도착한다. 나는 역 앞에 있는 매표소에서 버스 1일 승차권을 끊어 세븐시스터즈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 버스 타고 가는 길
내가 앉은 곳은 버스 2층 창가 쪽이었는데, 이동하는 동안 창밖에 눈을 떼지 못했다. 파란 하늘과 초록빛의 넓은 초원, 여유롭게 풀을 뜯는 소와 말들. 갑갑한 도시에서 벗어나 그림 같은 풍경에 자유로움을 느꼈다. 갑자기 뒤쪽에 앉아계시던 외국인 할머니가 말을 붙인다. “당신, 한국인이지?”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우와, 어떻게 아셨어요?” 할머니가 대답하시기를 먼저, 혼자 여행하는 것. 그리고 East Dean Garage 정거장에서 내리는 루트로 가는 친구들은 대부분 한국인이란다. 할머니의 말에 나는 어렵지 않게 수긍하며 엄지를 ‘척‘하고 치켜올려 드렸다. 갑자기 할머니가 다시 한 번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내가 지름길을 알려줄게. 이 길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길이야. 혼자 걸으며 산책하기 좋고 풍경도 예뻐. 바로 다음 정거장이야. 지금 벨 누르고 내려!” 얼떨결에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나 홀로 버스정류장에 하차했다. 나와 목적지가 같아 보이는 사람들은 다들 버스에 남아있는데…. 이런 불안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빙긋 미소를 지어주시고는 버스와 함께 멀어져 갔다. 할머니께서 알려준 남들이 잘 모르는 길이 내심 미심쩍기도 했지만 이 또한 나 홀로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 걸어서 가는 길
고즈넉한 시골 마을을 걸어가는데 인적이 드물고 조용하다. 아담한 나무 울타리 너머로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이 보인다. 꾸밈없는 초원에서 커가면서 자란 곳을 닮아 가는 걸까. 특별한 놀이기구 없이도 함께 뛰어놀고, 마주보며 웃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초원 위에 지어진 그림 같은 집, 한적하게 풀을 뜯고 있는 양 떼들. 평화롭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싶을 만큼 나긋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속에서 자연과 사람이 서로 어루만지고 품으며 공존하고 있었다.
# 7개의 절벽, 세븐시스터즈 해안 절벽(Seven Sisters cliffs)
멋지다. 세븐시스터즈에 첫발을 들이며 떠올린 생각이 그랬다. 더없이 맑은 가을날, 청명한 하늘이 그랬고 반짝이는 바다와 그 품에 안겨 고개를 빼꼼 내민 하얀색 절벽이 그러했다. 세븐시스터즈는 해안선을 따라 보이는 7개의 봉우리가 7명의 자매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일 높은 봉우리인 헤이븐 브라우(Haven Brow)는 해수면으로부터의 높이가 77m나 된다. 위험해 보이는데도 난간 하나 없다. 자연보존을 위한 영국인들의 확고한 의지이리라. 세븐시스터즈는 매년 그 얼굴을 달리한다. 빗물과 심한 파랑으로 매년 30~40cm씩 뒤로 후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하얀 절벽의 암석은 파도의 힘찬 붓질에 물감이 되어 바다 위로 떨어진다. 파도에 깎이고 바람에 조금씩 밀릴지라도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 새삼 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세븐시스터즈의 오른쪽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절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절벽 위를 총총걸음으로 움직이는 괭이갈매기와 바닷가에 유유히 떠다니는 조각배가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 푸른 하늘빛이 붉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세븐시스터즈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낮에는 태양 아래 광활한 자태를 뽐냈다면 어스름한 저녁에는 온 세상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 드라마틱한 풍경을 보여준다. 해가 설핏해지고 초원 위로 드리운 노을이 그림엽서처럼 아름답다. 브라이튼이라는 해안 도시가 숨겨 놓은 보석 같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