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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지

아버지의 연습장

by bluemind


"이렇게 공부해서 될까?"

책상 위에 놓인 미색지 연습장. 아버지는 당장 일이 없어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신다고 들었다. 빼곡히 적힌 작은 글씨들이 마치 흐릿한 잉크로 그려진 풍경 같았다. 반복적으로 쓰인 필체와 무질서한 배열 속에서 의문이 스쳤다. 효율적인 방법이 넘치는 시대에, 이런 고전적인 방식이 과연 통할까.


아버지는 평생 토목, 조경일과 씨름하며 살았다. 사업이라는 게 운이 좋게 입찰이라도 잘 되거나 누군가의 추천으로 하도급이라도 받으면 먹고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아버지는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사업을 하시면 안 되는 분이셨다. 이를 알아본 사람들이 아버지를 다시 찾아주기도 하였으나, 사기도 많이 당했다. 사업에 있어 우직함과, 성실함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를 보며 많이 느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3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켰다. 내내 현장을 다니다 보니 아버지가 귀가할 때면 흙내와 쉰내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손톱에 낀 흙때와 기름때는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손톱 하나는 까만 문신처럼 보였다. 팔다리에는 나뭇조각에 베이거나 상처로 남은 흉터가 그득했다.


아버지는 현장밖에 몰랐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도움을 주던 친구들도 하나둘 퇴직해 현업에서 물러났고, 입찰 역시 매번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앞만 보고 달려가던 경주마가 멈추듯, 아버지는 갑자기 일을 멈춘 시간에 책을 펼쳤다. “토목일은 이제 힘에 부치니, 조경일이라도 해야겠다”며 산림기사를 준비하겠다고 하셨다. 빼곡히 단어 하나하나를 적어 내려가는 아버지를 보며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아버지, 기출문제 보면서 쉽게 공부하세요. 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깜지를 써요?"


깜지는 과거에 자주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효율적인 암기를 위해 작은 글씨로 종이를 빼곡히 채워가던 그 모습은 한때 우리 모두에게 익숙했다. 그러나 성인이 된 뒤 깜지와 같은 방식은 다소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기출문제 기반으로 공부해야 하는 시험에서 반복적으로 적는 행위는 때때로 무의미하게 보인다. 아버지의 방식이 낡고 뒤처져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아버지는 한동안 하염없이 잠만 주무셨다. 깨어 있는 시간엔 곧바로 책상에 앉아 책을 보셨다. 그러다 어머니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마트에 함께 가고, 동네 산책을 했다. 그러다 의문이 생기면 산림 관련 책을 여기저기 수집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평생 해오던 일을 내려놓고 공부를 시작한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허전했을 것이다.

평생 해오던 일을 멈춘 아버지의 마음은.


그리고, 산림기사 합격이라는 결실이 찾아왔다.


반복되는 글씨 속엔 매일 쌓여가는 시간이 있었다. 비효율적이라 여겼던 그 방식은, 사실 아버지가 매 순간을 살아낸 시간이며 멈추지 않는 발걸음의 궤적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전을 믿으며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기록. 그것은 자신과의 약속이자, 매일 쌓아 올린 노력의 흔적이었다.


다시 채상 위의 미색지를 본다.

올바른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작은 글씨들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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