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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by bluemind



그냥.

‘그냥’이라는 말에는 참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단순히 이유가 없을 때 꺼내는 말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의 끝에 놓인 마침표 같기도 하다. '그냥'이라는 말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감춰두는 작은 도구이자, 모든 것을 담아내는 그릇 같다. 나는 '그냥'이라는 말이 좋다.


‘그냥’이라는 말은 깊은 산속 고요한 그림자처럼, 알 수 없는 어둠을 품은 강물처럼 잔잔하다. 때로는 그 위를 부유하는 나뭇잎처럼 가볍고 여유롭다.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한 것들, 이유 없이도 좋은 것들. ‘그냥’이라 말하는 마음의 물결이 내 가슴을 적신다. 마치 그 속에서 살아가는 당신을 만나는 일처럼.

그냥.

그 길을 걸었던 기억도 그러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발길을 향하던 사천선.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가는 길에 거리 구경도 하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군것질도 하며, 종종 한눈도 팔았다. 어머니는 우리의 '한눈'이 늘 걱정이었다.

“기찻길에 가면 안 된다. 꼭 큰길로 다녀야 해.”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은 금기보다 일종의 유혹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몰래 기찻길로 향해 콩자갈을 레일 위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덜컹덜컹.” 거대한 쇳덩이가 지나가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작은 돌멩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혹시 기관사가 기차를 세우고 우리를 잡으러 오는 건 아닐까, 어딘가에서 어른들이 경찰을 부르는 건 아닐까. 누군가 뒤에서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은 아찔한 기분에 온몸이 찌릿찌릿 했다. 잠깐이지만, 분명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철길의 끝에는 칠흑 같은 죽봉터널이 있었다. 한때 진주와 사천을 잇던 이 터널은 열차가 다니지 않는 적막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기적 소리가 멈춘 후, 터널 안은 불빛 하나 없는 암흑이었다. 초입의 곡선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깊은 어둠을 품고 있었고, 그 어둠은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처럼 다가왔다.


그냥.

어느 날 우리는 손전등을 들고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초록빛 이끼로 뒤덮인 벽은 축축했고, 머리 위에서는 박쥐들이 어둠을 가르며 날갯짓을 이어갔다. 터널 안에는 길을 헤맸던 야생동물의 흔적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스산한 바람이 우리를 에워쌌다. 발끝은 이미 터널 밖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밀려드는 어둠은 우리를 집어삼킬 듯 아득했다. 사라진 기적 소리 대신 남겨진 고요함, 그리고 그 적막을 깨던 발소리부터 우리를 가득 채웠던 어린 날의 웃음소리까지. 모든 순간이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냥.

사천선을 보러 가는 길은 먼 길을 돌아가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길을 좋아한다. 붉은 녹이 내려앉은 철길과 함께 어린 날의 기억과 터널 속 이야기는 지금도 변함없이 그 곳에 있다.

아마도, 이 모든 감정을 이렇게 담아낼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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