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자락, 연못가에서 발길을 멈췄다. 마른 꽃대들이 서 있다. 물 위엔 말라비틀어진 흔적들만 남아 있다. 이따금 일렁이는 물결 속으로 낡은 그림자가 흘러내렸다. 한때 분홍빛으로 넘실대던 자리는 고요만이 남아 있다. 그 위로 찬 바람이 스쳤다.
마흔을 앞둔 지금.삶은 점점 더 유한한 여정처럼 느껴진다. 예전에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마냥 웃고 즐기는 날들만 있을 줄 알았다. 요즘은 이마에 새겨진 주름보다 마음에 새겨진 변화가 더 크다.
주변엔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어머니는 좋아하던 믹스커피 대신 당뇨약을 드시고, 아버지의 귀에는 이명이 스며든다. 축제 때 큰 망치를 힘껏 내리치면 무게추가 항상 맨 꼭대기에 닿던 자랑스런 아버지는 이제 아픈 허리를 짚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 당이 안 좋대요.
아버지 밥 드시고 바로 누우시면 안 돼요.
건강 잔소리를 내뱉던 내가 병을 얻었다. 슬픔은 바람처럼 스며들어 내 마음속 가장 연약한 부분을 흔든다. 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누군가에 전화를 걸고 발품을 판다.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하면 금세 알 수 있건만. 가까운 친척, 오래된 친구, 그들의 손에 닿는 모든 연결이 나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평온한 얼굴 뒤로 고개를 돌리면 이내 슬픈 표정을 마주한다. 아버지는 헛기침으로 입가의 한숨을 지운다. 어디론가 숨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조차 숨이 막혔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울렸다. 잊고 살았던 먼 친척 누나다. 알고 보니 누나도 수년 전 같은 병을 가지고 수술했단다. 누나를 통해 나 몰래 울먹이며 자식 걱정을 한 어머니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자꾸 떠오른다. 아프기라도 하면 부모님이 나를 업고 병원을 뛰어가던 모습. 그땐 그들의 손길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느껴졌다. 이젠 내가 부모님의 병을 걱정하던 날들이 많아졌는데, 다시 그들의 손길이 나를 향한다. 그 손길은 여전히 따뜻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 온기가 나를 찌르는 칼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연못 위의 말라버린 꽃대를 보며 생각했다. 생명의 정점에 선 그 순간이 있기에, 지금의 고요와 침묵에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내가 아프고, 누군가와 이별하고, 점차 나약해진다고 해서 내 삶이 초라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삶의 또 다른 얼굴이다. 초음파로 보이던 검고 흐릿한 미세한 것을 태워냈다. 마음 한구석 불안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내 몸을 조금 더 돌아보라는 뜻이라고 믿는다.
다시금 내 안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삶은 오히려 그 유한함 속에서 빛난다. 한 계절동안 짧게 만개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이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기는 연꽃처럼 말이다. 가끔은 그 유한함이 두렵기도 하다. 내 사람들, 내가 쌓아온 추억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까 봐. 더는 마냥 즐겁게 살겠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 대신 삶의 매 순간을 배우고느끼며, 때로는 과감히 마침표를 찍을 용기를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