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골에 내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골목을 스칠 때마다 마음에도 겨울이 찾아온 듯했다. 집 뒤꼍에서 아버지는 큰 생선 세 마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새벽 어판장에서 우리를 위해 사 온 것이었다. 고기를 회로 떠 주겠다는 말에 무심코 웃음이 났다. 아버지의 손길은 정성스러웠고, 칼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은 차가운 땅 위에서 금세라도 얼어붙을 것 같았다.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아궁이의 따뜻한 냄새를 맡은 것일까.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고양이는 색색의 털을 가진 집 주변 고양이들 중 하나가 아니었다. 도끼비풀을 온몸에 붙인 채, 추위에 한 껏 웅크리고 있었다. 아궁이 불빛이 그 작은 몸을 데웠다.
묘생(猫生)이란, 어쩌면 그런 삶일지도 모른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그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온기를 좇는 것.
고양이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계산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다만, 본능적으로 지금 필요한 것을 찾는다. 그 단순함 속에는 삶의 진리가 숨어 있다. 철저히 현재에 충실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사는 단순함과 충만함을 다시금 일깨운다.
생선을 손질하는 아버지의 손끝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기다리는 고양이를 가만히 지켜봤다. 배고픔에 발을 동동 구르지도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앉아 따스한 불빛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기다리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 아버지가 고기를 나눠 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걸까?
나였다면.
“도망칠 것도 없이, 이번 생은 망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망가진 꼬리를 쓰다듬는 것만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은 존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관하지 않는다. 그저 필요한 것을 찾고, 기다릴 뿐이다. 고양이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살아가는지.
아버지가 손질한 고기 한 조각이 고양이 앞으로 던져졌다. 순간 고양이의 눈이 빛났다.
나는 묘생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기다림,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얻는 작은 온기였다. 고양이는 아궁이 앞에서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추위와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래도록 아궁이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삶은 사실 그리 복잡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