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웃음이 마스크에 갇혔다.
“엄마 마스크 3개 쓰고 친구들 만나면 안돼?
마스크 안 벗고 놀게. 응? 약속해.”
오늘도 아이는 친구를 찾는다.
밖에서 잠깐이라도 놀게 해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한다.
밖에서만 놀겠다, 마스크 잘 쓰겠다 다짐을 늘어놓는다.
친구들과 하루 24시간을 함께 했던 아이였다.
밖에서 놀던, 집으로 친구를 데려오던 늘 쿨하게 허락했던 나였다.
그런 나와 아이는 하루에도 몇번 씩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아이는 애원하고 나는 그 애원을 들어줄 수 없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안돼!, 안돼!, 안된다고…!
나중엔 설명하기도 지쳐갔다.
사실 나는 애원하는 아이를 설득할 마땅한 당위성이 없었다.
왜 친구를 만나면 안되는가, 왜 친구의 손을 잡고 뛰어놀 수 없는가.
“우리는 학교에 가지도 않고 집에만 있잖아.
그러면 코로나 걸릴 위험도 없는데 왜 친구들 만나면 안돼?”
“도대체 어른들은 왜 말을 안 듣는거야! 왜! 우리 학교 못가게 하는거야!”
“코로나 나빴어! 코로나 때문이야!!”
© Engin_Akyurt, 출처 Pixabay
다음주는 등교를 한다,
한달 후엔 등교를 할 수 있다라는 희망고문이 연이어 이어졌다.
부푼 상상을 했던 입학식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되었다.
입학식 날 사탕 꽃다발을 들고
교문 앞에서 사진을 찍자는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교실 칠판 앞에서 한명 씩 인증샷을 찍은 게 전부였다.
교과서를 받으러 간 날, 교문 앞에서 마스크를 쓴 담임선생님 얼굴을 처음으로 뵈었다.
“등교하는 날 교실에서 반갑게 만나자”
그 약속은 한참이 지나서야 지켜지게 되었다.
코로나가 시작되었다는 나라로 혹은 종교로 혹은 특정 집단으로 향해졌다.
[누구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안 좋은 표현이라고 알려줬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코로나 [때문에] 이렇게 지내게 되는구나.
어른들 [때문에] 너희들이 피해를 보는구나.
코로나로 인한 최대 희생양은 아이들이다.
학교가는 것을 잠시만 쉬면 되는 줄 알았다.
그래, 봄방학이라 생각하자, 1학년때 학교는 좀 쉬엄쉬엄 가도 되지 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 엄마였던지라 1,2주일 쉬다가
학교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내심 좋게 생각했었다.
허나 학교 문턱을 밟는다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 일이 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싶다.
방송을 통해 공부를 한다는 것에 처음에는 흥미를 보였으나 이내 지루해했다.
교과서에는 왜 이리 친구와 함께 해보는 활동들이 많았는지.
소소해보이는 것도 짝꿍과 같이 하면 재미났을텐데.
“가족들과 해보세요”, “나중에 학교가서 친구랑 해보세요”라며
넘어갈 수 밖에 없었던 시간들이 많았다.
아무리 호랑이 선생님과 꿀벌 선생님이 재미있다한들
옆의 친구와 속닥거리는 재미, 쉬는 시간에 손잡고 노는 재미,
운동장에 나가 뛰어노는 재미없이
그냥 막연히 바라만 봐야하는 동영상 교육이 어떻게 집중이 되겠는가.
어느 날은 과제를 하다가 아이보다 내가 더 상처를 받은 적이 있었다.
과제명 : [친구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려보기]
아직 못 만난 친구지만 내 짝꿍은 누구일지 상상해보며 그려보는 과제였다.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를 [상상 속의 인물]로 받아들였단 말인가.
아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린이집 친구를 그렸다.
그림 귀퉁이에는 ‘보고싶다’라는 말도 빼놓지 않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