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의 나는 동네에서 으뜸가는 낚시꾼이었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고기를 잡으려면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낚시 전략이 있다. 전날 밤에 미리 보리밥을 한 가득 신문지에 담아서 나만의 명당자리에다가 아무도 몰래 뿌려둔다. 그리고 또 다른 보리밥 한 덩어리는 된장과 참기름을 적절하게 섞어 살짝 숙성을 시킨다. 다음 날 새벽에 가장 일찍 연못에 도착하는 것도 물론 나다. 그러면 당연히 나는 꾼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붕어를 낚는다. 누구에게나 가슴 뛰는 일이 있고 그 일은 재미가 있는 것이다. 한 여름 새벽 다섯 시쯤 일어나서 낚싯대를 둘러메고 연못으로 가는 일은 가슴 뛰는 정도를 넘어 정말 숨이 가빠지도록 즐거운 일이었다. 그때가 10살 무렵이었다. 지금이야 휴대폰 게임이나 인터넷 검색을 해서 영화를 보거나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지만 당시는 별로 재미있는 일이 없었다. 낚시가 내게는 가정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외할머니가 붕어를 넣고 끓인 추어탕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낚시에 빠져 시간 가는 줄은 몰랐지만 배꼽시계는 항상 정확해서 뻐꾸기가 울듯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면 어김없이 저 못 둑으로 올라오는 마을 끝에서부터 나를 찾는 외할머니의 간절한 소리가 들렸다. ‘식아, 밥 먹어라’. 그러면 ‘할매, 조금만 더’ 하고 소리를 내 질렀다. 또다시 ‘야, 이놈의 종내기야, 밥은 먹고 해야지.’하는 보채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못해 낚시를 접는 것이다. 이제 다시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영글어가는 포도밭을 지나 못 둑 위로 점점이 울려 퍼지던 외할머니의 새끼를 향한 소리는 잊을 수가 없다.
당시가 70년대 후반이었으니 먹을거리가 정말 부족했다. 할머니는 내가 잡아 온 붕어를 쉽게 다듬으셨다. 칼로 비늘을 쓱쓱 긁어내고 배를 툭 따고는 안에 있는 내장을 집게손가락으로 끄집어내셨다. 그리고는 하얀 천에다가 붕어들을 다 집어넣고 실로 꽁꽁 싸맨 다음 푹 삶아내셨다. 물고기가 삶기는 동안 텃밭에 있는 파, 고추, 미나리 같은 나물들과 처마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시래기를 삶아 건더기를 만드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물고기가 솎아지고 나면 하얀 천을 힘껏 짜 준다. 그러면 그 천을 통해서 나온 붕어의 속살과 연한 부위의 것들로 풍성한 육수가 만들어진다. 다시 다진 양념을 넣고 군불을 때면 가마솥에서 추어탕 한 그릇이 뚝딱 만들어졌다. 보리밥을 고봉으로 퍼 담고 마늘과 제피가루를 더한 추어탕 한 그릇에다가 풋고추를 된장에 푹 찍어 먹으면 한 여름의 더위가 싹 가시는 것이었다. 새벽녘에 시작된 낚시가 그렇게 마무리되고 나면 스르르 눈이 감기는 오후의 질펀한 낮잠이 나를 살 찌웠다. 할머니는 그렇게 퍼질러지는 손자 옆에서 손부채를 저으며 툇마루의 오후 햇볕을 가려 주셨다. 한여름의 태양도 할머니의 손바닥을 뚫지는 못하는 시간이었다.
직장에 다니면서 여러 번 추어탕을 먹으러 다녔다. 소문난 맛 집이라고 해도 할머니의 손맛을 따라잡는 집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해 주신 추어탕도 맛은 있지만 할머니의 맛과는 차이가 났다.
지난여름 아들과 함께 외가가 보이는 연못에 앉아 낚시를 한 적이 있다. 예년만큼 고기도 없을뿐더러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찐 맛만 다시다가 세월만 낚았다. 아직도 사립문을 열면 할머니가 ‘아이고, 우리 강새이 왔나?’ 할 것 같았다.
허기진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 녀석과 둘이 앉아 된장국을 먹었다. 할머니의 손맛이 나를 살찌웠듯 아들 녀석의 숟가락질이 맛나 보인다. 배가 고팠는지 이리저리 섞어 후루룩 한 그릇을 넘기는 녀석의 모습에 순간 세월을 넘나드는 추어탕의 향이 내 목구멍을 통해 넘어갔다. 된장국에서 추어탕의 맛이 났다. ‘아! 이 맛이었구나. 입 안을 감싸고도는 정성과 사랑의 맛! ’뭐 한다고 이때까지 밥도 안 먹고 그랬어요?‘ 하는 아내의 지청구가 할머니의 목소리인지 아내의 목소린지 순간 헛갈렸다. 아이에게는 이 된장국이 먼 훗날 그리움의 맛이되리라는 걸 행복해하며 '아, 배 불러요.' 하는 흐뭇한 얼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다가오는 휴일에는 외할머니 산소에 꼭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