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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생 Jun 22. 2020

샐리와 보낸 한달

호주 나루마의 추억

                                                                                                                                                          

마흔 살 무렵에 여행을 떠난 일이 있다. 호주 시골 마을 ‘나루마’에서 한 달을 보내게 되었다. 국제교류의 일환이었는데 한 달 씩이나 가 있을 사람이 없어 졸지에 내가 당첨이 되었다. 나루마라는 곳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어느 면 소재지 정도 되는 곳이었다. 사는 사람들이 다 해야 고작 삼천 명 수준이었으니 한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새까맣고 삐삐마른 동양인에게 ‘헬로우’라는 인사말을 건네었다. 
내가 한 달 간 살아야 할 홈스테이의 호스트는 육십이 다 되어 정년을 앞둔 과학 선생님 ‘샐리’였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얼마나 뚱뚱한지 표현하기가 좀 뭣하다. 하여튼 나는 이혼 후 혼자 사는 ‘샐리’ 선생님과 한 달간의 동거 아닌 동거에 들어갔다. 돌이켜 보면 많은 불편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침마다 샌드위치를 만들고 점심도시락을 싸야하고 저녁도 따로 준비해야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불편은 낯선 젊은 동양인과 한 집을 써야한다는 사실이었지 싶다. 그렇게 며칠 동안 생활하는 가운데 어느 저녁나절이었다. 나는 동네를 쉬엄쉬엄 한 바퀴 돌고 들어왔는데 마침 샤워를 하고 목욕가운을 둘둘 감고 나오는 샐리와 부딪쳤다. ‘아, 미안해요’(Oh, I'm sorry!)를 연발하며 방으로 들어왔는데, 그녀가 하는 말이 ‘괜찮아, 그냥 샤워를 했을 뿐이야!’(No problem, just shower.). 물론 나도 알지만 그녀의 반쯤 벗은 몸을 보았으니 너무 미안했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당당하게 방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전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날씨와 산책했던 일과 낮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사랑과 일상의 명확한 구분이 서게 되었다.
다음 날은 학교 조회가 있는 날이었다. 우리가 으레 조회라고 하면 줄을 맞춰서고 교장선생님이 장광연설을 하시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떠들고 질서가 곧 엉망이 된다. 형식적인 것이다. 호주라고 해서 별거 있겠냐는 생각으로 조회에 참석했다. 역시나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 럭비공을 이리저리 던지고 잡기 놀이를 하고 정말 무질서했다. 게다가 줄도 없으니 이건 뭐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또 마이크를 잡은 친구를 보니 학생이었다. 엄한 학생부장도 아니고 이래가지고는 조회가 되겠나 하는 찰나, 대표학생이 ‘안녕하세요, 여러분!’(Hello, guys!)이라고 했다. 순간 그렇게 정신없이 떠들고 달리던 아이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남의 말을 경청하고 누군가가 상을 받으면 정말 기쁨으로 박수를 보냈다. 대표학생이 한국에서 한 교환 교사가 왔다는 말을 전해주며 나에게도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수천 명의 응시를, 정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단 한명의 일탈도 없는 그런 관심을 받았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며칠 후 음악공연이 있었다. 샐리가 특별히 그 공연은 아이들이 지난 학기동안 연습한 것을 발표하는 날이라고 말해 주었다. 샐리와 같이 공연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었다. 의자도 없었고 안내하는 사람도 없었다. 가만 보니 의자는 각자가 들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 곳에나 원하는 곳에 접이식 의자를 펴고 앉도록 했다. 나는 샐리와 같이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여전히 소란하고 시끄러웠다. 악기를 조율하는 동안에도 어떤 이는 서고 어떤 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구르며 떠들고 깔깔거렸다. 하지만 예상하는 바대로다. 사회자의 ‘안녕하세요, 신사숙녀 여러분’(Hello, ladies and gentlemen!) 하는 소리에 장내는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 행사가 순조롭게 뜨거운 박수와 감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 한 가지는 교장선생님 이야기다. 그는 흰 구레나룻을 멋지게 길렀는데, 바지는 늘 청바지였지만 위에는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깔끔하게 입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스쿨버스를 타고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잘 계시는지, 형은 멀리 가서 잘 정착했는지, 그 집안의 대소사를 다 아는 듯 했다. 참, 이곳의 스쿨버스는 심지어는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땅이 워낙 넓어 사실 한 시간 반도 가까운 거리라고 했다. 멀리서 오는 학생들을 마중하고 환영해주던 교장 선생님의 그 모습은 내 뇌리에 남아있다.   
돌아오기 전날 샐리는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다. 나는 시드니나 멜번과 같은 도시에 가 보고 싶다고 했다. 오페라하우스도 보고 하버브리지도 보고 돌아갈 계획이다라고 했더니 샐리는 이렇게 말했다. '도시는 그냥 도시일 뿐이야!' (City is just city!). 
선진국의 조건은 일인당 국민소득 삼만 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돌아오는 내내 들었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배려하며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선진국의 조건이었다.                                                       


[아무렇게나 서 있지만 가장 높은 수준의 질서가 존재하는 조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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